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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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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도리
인천공항에서 북쪽방향으로 이륙하는 비행기 창가에서 활주로 너머 바로 보이는 기다란 섬이 장봉도다. 그 장봉도 끝의 서쪽으로 동만도, 서만도라는 작은 무인도 형제 섬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동만도는 약 육만 평, 서만도는 약 오만 평 정도로 오백 미터 거리의 두 섬 사이는 썰물 때 걸어서 건널 수 있는데 동만도에는 일정 때 만들었다는 우물이 있어 언제나 물이 물통에 넘쳐흐르고 있어 옛 부터 부근에서 고기 잡던 어선들이 들러 식수를 얻는 곳이라 했다. 우리 고향 강화에서는 두 섬을 합하여 만도리라고 불렀으며 만두리라고도 한다. 일 년에 한두 번 굴을 따러 마을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른다고 했는데 사람이 살았던 적도 있다고 했다.
그 곳 만도리는 나와 그리고 대학친구 몇에게는 매우 추억어린 섬이다. 그리고 아직도 다시 한 번 같이 가고 싶은 꿈의 섬이기도 하다.
대학교 이학년 때인 1968년 여름방학 때 친구 넷과 나 그렇게 다섯이서 그 만도리를 찾아 일주일 정도 지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아직 강화에 다리도 놓이기 전이요 내가 살던 양도면의 시골동내에는 전기는커녕 집 앞 신작로도 자갈길이고 강화읍에서 양도를 거쳐 화도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겨우 다니던 시절로 그 강화까지 네 명의 대학친구가 거의 맨 몸으로 만도리에 놀러가자고 왔는데 사실 그곳에 놀러가자고 바람 잡은 것은 바로 나였다.
당시 동내에서 한집 식구가 여름 한철 만도리에 들어가 지내고 있었고 거기 다녀온 그 집 조카가 되는 친구가 고등학교 동창으로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서 대학친구들과 만도리 캠핑을 계획한 것이다.
쌀 한말, 간단한 낚시도구, 됫병 술 두병, 한 갑에 20원 하는 필터 없는 담배 백조 몇 갑과 10원짜리 담배 새마을 두 보루, 배터리를 칭칭 감은 트랜지스터라디오, 그래도 당시에는 귀한 니콘 카메라, 누구에게서 빌렸는지 기억에도 없지만 군용 에이형 텐트 두 세트, 군용 담요 서너 장 .........
이상이 지금 기억에 남는 당시의 캠핑 준비물인데 이정도의 짐만 가지고 겁도 없이 다섯이 무인도로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우선 배를 타기 위해 건평으로........
건평에는 친구 집에 배가 있어서 그 배로 만도리까지 태워 달라 해서 선주이며 선장인 친구 형님의 승낙을 얻었다. 그 배는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된 배로 그전에 부리던 돛배를 정리하고 장만한 디젤 엔진을 얹은 신형 배였다. 저녁 후에 그 배는 건평을 떠나 어류정 앞바다에서 닻을 내려 밤을 지난 후 다음날 새벽에 출발하여 만도리의 서만도에 일행을 내려놓고 짐을 실러 간다고 인천 쪽으로 향했다.
섬에는 섬에 있는 식구들이 타고 온 걸로 보이는 돛배 한 척이 매어있었는데 뱃소리를 듣고 나온 섬의 부부는 놀라면서도 일행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섬에는 집이 한 채 있어 거기에 동내에서 온 친구의 작은 아버지 부부가 서른 살 정도의 아들과 함께 여름을 나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놀러왔다는 옆 마을의 어른도 서너 명 있어서 그 어른들은 그 집에서 기거하며 약초도 캐고 고기도 건지며 며칠 째 즐기고 있다고 했다.
섬에 올라 우리는 우선 집 가까이 해변에 텐트를 치고 야영준비를 하다가 아예 친구의 작은아버지의 집 방 한 칸을 얻어 거기에 짐을 모두 풀었고 돌아올 때가지 숙식모두 그 집 신세를 졌다.
가지고 간 두병의 됫병 소주는 마침 술이 동이 난 섬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술을 담갔는데 하루 이틀 더 있어야 술이 익는다고 했다.
오전에 물이 빠지니 건너편 동만도까지 갯골이 들어나 건널 수 있어 모두 건너가 일제 때 만들었다고 말로만 듣던 그 우물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해변의 산 밑 절벽아래 만들어진 우물은 샘도 많이 솟아 시멘트로 막아놓은 두세 평 정도의 물 저장 수조에는 맑고 시원한 샘물이 졸졸거리며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 정도 물이라면 대여섯 척의 배가 한꺼번에 몰려와도 물 때문에 다투지는 않을 거로 보였다.
동만도와 서만도 사이의 갯골에는 아저씨가 백 미터 정도의 길이로 그물을 쳐놨는데 물이 빠진 뒤에 그 그물에서 고기를 건진단다. 오후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서 그물 위쪽에 걸려있는 두 마리의 고기가 보여 아저씨의 아들이 나를 보고 헤엄쳐 가서 고기를 가져와보라 해서 그 두 마리를 떼어왔다.
한 마리는 육십 센티 정도의 삼치였고 다른 하나는 이름도 모르는 70 센티 정도의 고기로 우리 일행은 그 고기들을 돌아가며 들고서는 기념으로 사진을 한 장씩 찍었는데 그 사진은 아직까지도 내가 가장 아끼는 옛 추억의 사진 중 하나다.
오후 늦게 물이 완전히 빠지니 그 그물에는 반 망태 정도의 이런 저런 고기들이 섞여 있었는데 그 절반은 십여 년 전부터 인천 횟집에서 인기 있는 밴댕이로 그 크기가 요새 인천 횟집의 밴댕이와는 확연히 구별될 정도로 굵고 싱싱했다.
미리 왔던 어른들은 물이 빠졌으니 섬 앞쪽 갯벌에서 대합 주워야 한다며 같이 나가자해서 우리 다섯은 같이 갯벌로 나아가 어른들과 같이 대합을 찾기 시작했다. 섬 안쪽 그러니까 강화도 방향으로 넓은 갯벌이 썰물에 들어나는데 그 갯벌의 넓이가 여의도 정도의 넓이라고 했다. 그 갯벌 위를 한 시간 정도 찾아다녀도 두 사람이 하나 정도의 대합을 줍기가 어려웠지만 일단 발견되는 대합의 크기는 장난이 아니다. 대합 두 개 정도로만 회를 장만해도 만도리 일행 십여 명이 모두 즐길 수 있는 분량인데 거기다 밴댕이회까지 있으니 모자라는 것은 오직 술뿐이었다. 담근 술이 익고 있으니 됫병 소주로 이틀만 견디잔다.
그렇게 만도리의 첫날은 지났고 다음날은 섬 여기저기도 돌아보고 수영도 하고 소라도 줍고 낚시도 해보고 했는데 미끼 구하기가 어렵고 경험도 없어서 낚시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물이 빠진 후 갯벌을 뒤져서 대합을 줍고 그물의 밴댕이회로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갯벌을 돌아다니면서는 군데군데 물 고인 곳에 몰려다니는 잔 새우 떼를 볼 수 있었는데 그 새우가 선수앞바다에서 잡히는 강화도 젓갈용 새우란다.
강화도의 초지나 외포리 그리고 전날 배를 탄 건평만 하더라도 푸른 바닷물 보기가 힘들었는데 만도리주위의 바다는 거의 푸른 물이었다. 서쪽으로 탁 터진 수평선의 낙조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하루는 바람이 너무 세차서 방에 모여 대낮에도 물어대는 섬모기를 쫓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당시 서해안 해수욕장의 인파와 들뜬 분위기로 가득한 바닷가 유원지와는 전혀 다른 외딴 섬의 그런 하루는 좀 답답하기도 했으나 화투놀이도 하면서 트랜지스터라디오에서 들리는 방송에도 귀를 기울이며 떨어져가는 담배에 신경을 써가면서 친구들은 하루 종일 시시덕거리며 또 저녁에는 농주도 맛보며 그렇게 보냈다.
그러다가 다음날은 밤늦게 모두 횃불을 밝히고 물 빠진 섬 사이 갯골의 바위들을 뒤집어 뒤져 박하지라고 하는 주먹크기만 한 게를 가마니로 잡았고 소라도 제법 건져냈다.
다음날 그 잡은 박하지를 가마니 솥에 삶아서 원 없이 먹었는데 모두 하루 종일 설사를 해댔다. 삶은 게의 게딱지를 뜯어내고 스폰치 같은 게의 허파를 떼어내고 먹어야 하는데 모두 그냥 먹었기 때문이다. 누가 그걸 알았나.
그 다음날 저녁때도 모두는 횃불을 다시 밝혀 전날의 그 갯골을 다시 뒤졌는데 오히려 요령들이 늘어 더 많은 박하지를 신나게 잡아냈다. 다음날이면 모두 돌아간다고 해서 그래서 잡은 게를 집에 가져갈 거라고 열심히 그리고 신나게 바위를 뒤집어서 양 집게발을 벌리고 뒷걸음치는 박하지 들을 곧잘 움켜냈다.
한 친구는 아예 가죽장갑을 한손에 끼고 박하지가 장갑을 물어대면 그대로 그 박하지를 망태에 털어냈는데 그날 그 친구가 가장 많은 박하지를 잡았다.
그날 잡은 박하지는 전부 소금을 잔뜩 뿌려 갈무리 했다.
그 다음날 우리 일행과 옆 동네 어른들 그리고 친구의 작은아버지 식구 모두는 오전에 짐을 챙겨 돛배를 타고 강화로 향했는데 서너 시간 걸려서 동내 앞 하일리 제방의 갯골에 도착해 배를 대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는 평생의 몇 번 안 되는 돛배 여행의 마지막이 되었다.
친구 집 식구들은 며칠 후 다시 만도리로 들어갈 거라고 했는데 일행의 짐은 전날 잡은 박하지 때문에 오히려 섬에 갈 때보다 더 많아져 20여분 거리의 우리 집까지 모두 낑낑대며 땀을 흘렸다.
집에 도착한 일행은 얼마 후 집 근처인 친구의 작은아버지 댁에 들러 그동안 고맙다고 인사 한 후 짐을 챙겨 서울로 출발했고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만도리의 여행은 일단락 됐다.
개학 후 우리의 만도리 여행은 학교에서 큰 이야기 거리가 됐으며 한동안 우리끼리는 만날 때마다 두 팔을 벌리고 두 손가락을 펼치는 박하지의 모양의 인사가 유행했었다. 그리고 서로는 언젠가 다시 한 번 만도리를 다시 찾자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만도리의 그 일행은 그 일이 있은 후 사십년이 되는 2008년 어느 늦봄 그 옛 일을 기념해서 배를 한 척 대절해서 대학교 선후배들과 함께 영흥도로 바다낚시를 다녀왔다. 애초 다시 한 번 만도리에 가보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지금 만도리는 예전의 그 집도 없어진 무인도로 특별히 배도 빌리고 허가도 얻어야 하는 등 만만하게 다녀올 곳이 못되기에 결국은 그런 바다낚시만 다녀온 것이다.
가끔 고향을 들러 건평 앞바다에서나 아니면 섬 남쪽 차도를 지날 때 바다 위에 보이는 만도리 그 쌍둥이 섬이 보일 때마다 나는 깊은 회상에 잠기곤 하는데 언젠가 인천 공항을 이륙한 여객기의 창가를 통해 언 듯 스쳐가는 두 섬을 보면서 나는 한참이나 창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살아생전 그 일행과 함께 아니면 부부동반해서 꼭 한번 다녀오고 싶은 곳이고 특히 그 우물이 아직도 옛 그대론지 궁금하지만 언제 그럴 수 있을는지는 그저 마음뿐이다.
(2010. 10. 2. 동탄면 목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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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광익님의 댓글
고1 때 장봉도로 캠핑 갔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밤에 횟불을 밝혀 들고 꽃게 무지무지 많이 잡았던 추억이 바로 어제 일인듯 합니다. 당시 육지에서는 꽃게값이 무지 비쌌었는데 그저 욕심껏 잡은 꽃게를 다 먹지 못해 결국엔 다 버리고 온 ........ 지금 생각해도 아까운....^*^ ...재밌게 읽었습니다.
劉載峻님의 댓글
반갑습니다 선배님 평소 세심한 관심이 없는데다 특히 지형 위치 개념이 뒤져...항공기에서 본 위치 설명 선명히 이해 못 해 안타까운 가운데 열심히 읽는 열성 ? 으로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궁금증? 동탄면 목리 면?? 평택 인근인가요 글쓰신 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