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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의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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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의 뒷이야기
얼마 전에 인천 바다가 얼었을 때 강화로 가던 갑제호가 얼음에 부딪쳐 침몰했던 1963년도 겨울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있는데 그 글 중에 당시 그 배를 탔었던 고교 동창 황인환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환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모임에서 계속 만나는 절친한 사이로 사십 년 이상 사귀어오는 좋은 벗이다. 나도 올해 쯤 큰 아들을 장가보내야 할 처지고 인환이도 과년한 딸의 결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피차에 그런 세월을 지내고 있는 처지다. 그 글에서 갑제호가 침몰할 당시의 이야기를 자세히 적을 수 있었던 것은 고교시절에 들려줬던 인환이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글을 고교동기동창 카페에 올렸는데 얼마 후 모임에서 부부동반으로 만나보니 친구 인환이도 그 글을 읽었던 모양이다.
인환이가 내 옆자리로 와서 말을 꺼냈다.
“야 효철아, 네 글 보고 정말 놀랬다. 너는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갑제호 이야기를 나보다 더 생생하게 글로 썼더라.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아, 너 그 글 읽었구나. 그런데 그건 인환이 네가 나한테 학교 다닐 때 이야기 한 그대로 적었을 뿐이야. 그때 네 이야기 들으면서 그 사고 나기 며칠 전에 나도 강화에서 인천 올 때 갑제호를 탔고 네가 있었던 자리에서 바다구경 했다고 너한테 말 한 기억도 있는데.......”
“그래? 응? 그래, 그래....... 네가 이야기하니 글쎄 그런 이야기 기억나는 거 같기도 하고....... 야, 하여튼 너 기억력 한번 대단하다.”
“그건 말이야. 내 기억력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내가 그 일은 그 후 갑제호가 인천항에 끌려온 후에도 일부러 구경갔다올 정도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네 이야기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그날 갑제호에 올라가보니 말이다 겉으로는 말짱한데 구멍 난 앞쪽 선실은 연탄난로가 뒹굴고 있고 짐들도 어지럽고 그렇더라. 배 앞에 뚫린 구멍은 우리 머리하나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크지 않은 거 같았는데 그 바람에 배가 가라앉았다니 실감 안 나데....... 나중에 갑제호가 다시 운항할 때 보니까 그 뚫렸던 자리에 철판을 덧대서 리벳박고 용접한 것도 기억하는데.......”
모임의 친구들은 대부분 고등학교동창으로 거지반 내가 동창 카페에 올린 그 글을 읽었기 때문에 그 추웠던 옛이야기에 모두 귀를 기울이니 그 이야기는 계속하여 이어졌다.
다른 친구 하나도 그때 입학시험 치러 강화에서 인천으로 올 때의 고생담을 꺼낸다.
입시 전날 인천으로 오려면 갑곳나루를 건너야 하는데 성애(늦겨울 한강 얼음이 풀려 바다를 메우는데 그 얼음 덩어리를 성애라 한다.)가 심해서 배가 건너지 못해서 그 추운 날 종일 갑곳에 나와서 기다리다가 많은 수험생과 학부형 그리고 선생님들은 다시 강화읍의 여관에서 그날을 지내고 시험 당일 새벽에 다시 갑곳까지 나와 그 아침 특별히 운행된 해병대의 작전용 상륙주정을 타고 바다를 건넜단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버스 두 대를 대절하여 수험생들과 인솔교사를 각각 싣고서 먼저 인천으로 달려 시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했다.
사실 그 이야기는 그날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그래도 모두 재미있게 그 이야기에 모두는 귀를 기우리며 옛적을 회상한다. 당시 강화사람들은 교동이나 삼산, 아니면 서도 등 강화의 부속 섬에 사는 사람들을 보고 오히려 섬사람이라고 부르면서 강화도는 그래도 큰 섬이라고 웬만한 불편은 그러려니 하며 살았지만 한겨울 성애가 나면 무척이나 유별나게 섬사람다운 고생을 해야만 했었다. 그러니 추운 겨울이 오면 강화사람들이 섬이라 부르는 곳의 섬사람들 고생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강화와 김포사이에 다리가 놓인 때가 내가 대학교 다니던 1970년 1월인데 그 전까지 강화에서 살아온 것을 살펴보면 정말 어떻게 그렇게 살아왔는지 답답하고 어려웠던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6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리만 없었을 뿐이지 늦겨울 성애가 나지 않을 때는 이미 서울로 그리고 인천으로 시외버스들이 빈번히 다녀서 그 이전에 하루 한번 씩만 다니던 인천행 여객선의 세 노선만 의존하던 똑대기(강화에서는 똑딱선을 똑대기라 불렀다)시절보다는 훨씬 좋아진 것이 사실이다.
강화읍에서는 한 시간마다 한 두 대의 버스가 서울이나 인천으로 출발했는데 인천까지 거의 두 시간 반 정도 걸렸어도 똑대기보다 훨씬 빨랐을 뿐 아니라 부평을 지나 동인천을 종점으로 다니는 길 편이 선창가 부두에서 내리는 경우보다 여러모로 편리했다.
다리 개통 전에는 불하받은 군용 상륙용 주정인 소위 엠뽀드라 불리운 배가 갑곳에서 바다건너 성동까지 버스 등 차량을 실어 날랐는데 빠를 때는 십 분 이내 늦어도 보통 반시간 안에는 갑곳나루를 버스에 탄 채로 건너다녔지만 한겨울 성애가 나면 사정이 확 달라졌다.
배가 건너기 어려워져 하루에 서너 번 조류가 약해질 때를 기다려 사람들만 배로 건너게 되는데 어떤 때는 건너는 중간에 얼음에 갇혀 엠뽀드가 조류에 밀려 북방 한계선 쪽으로 밀리는데 그러면 해병대에 비상이 걸려 헬기가 뜨고 한바탕 난리를 친다. 엠뽀드 안에 갇힌 승객들은 선실도 없는 추운 배안에서 꼼짝없이 서너 시간동안 공포와 추위에 떨어야만 했었다. 그래도 똑대기타고 다니던 시절에는 추운 겨울에 아예 배가 못 다니는 경우가 흔했기에 그 난리를 쳐도 그 편이 더 나은 것이라 했다니 참 기가 막히는 시절이다.
시외버스가 다니기 전에는 갑곳에서 초지를 거치는 뱃길과 교동에서 석모도를 거쳐 외포, 건평, 선수를 지나 장봉도 시도를 돌아 인천을 향하는 뱃길 그리고 사기리에서 출발하는 뱃길 이렇게 세 뱃길에 똑데기가 다녀 그 똑데기들을 타고서야 인천을 다닐 수 있었다. 물론 서울 가려면 인천으로 가서 인천에서 서울로 다녔다니 그때는 서울나들이가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때 때문에 하루에 한 시간 정도 뱃 시간이 늦어지므로 당시 인천 왕래가 자주 있는 집에서는 매달 동양기선 사무실에 들러 배 시간표를 받아 챙기기도 했다.
황보호, 갑제호, 5통운호, 2통운호, 수원호, 구길호 등은 그 옛적 강화사람들에게는 낯익은 똑대기의 이름들이다.
내가 대학교 다닐 때 방학이 되어 강화 하일 집에 있을 적에 보면 거의 빈 배 상태로 앞바다를 지나는 갑제호나 2통운호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목격했는데 이미 초지나 사골(사기리를 사골이라 불렀다)뱃길은 손님이 끊어져서 없어졌고 교동 뱃길은 어쩔 수 없이 운항되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 뒤 언제 그 뱃길도 끊겼는지는 잘 모르겠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인환이의 갑제호 침몰 후 그 뒷이야기가 계속 됐다.
하여튼 인환이는 구조선을 타고 인천으로 돌아왔고 그 후에는 입학식이 있을 때까지 교동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2월말의 교동중학교졸업식 때에도 인천에 머물렀는데 교동에 한 번 들어가게 되면 입학식에 맞춰 인천으로 나올 배편이 더욱 어려워질까 봐서 아예 인천의 친척집에 머무르면서 인천구경만 잘 했다고 했다.
“인환아 그런데 너는 인천에 입학시험 보러 올 때는 언제 온 거니?”
“응, 그러니까 올 때는 며칠, 그러니까 시험보기 전 삼사일 여유 가지고 큰 배 통운호 타고 왔거든.”
“그럼 5통운호네. 교동 다니는 배는 5통운 아니면 2통운호인데 5통운이 큰 배였거든.”
“난 2통운호인지 5통운호인지는 잘 모르겠고 하여튼 그때가 나는 처음으로 인천에 와본 거야.”
“그래? 넌 영렬이 같이 갑곳에서 기다리던 그 고생은 안 했구먼. 근데 그 나이 되도록 인천도 한 번 못 와 본 완전 교동 섬 촌놈이었단 말이야?”
“이거 촌놈 촌놈 하지 마. 그래도 교동에선 비행기는 늘 보고 자랐어. 사실 인천 와서 처음 기차 구경했는데 그 기차도 한참 뒤 일학년 다닐 때나 타봤어.”
중학교 졸업 때가지 섬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는 인환이의 이야기에 모두는 대단한 비밀이 벗겨졌다고 한참이나 즐거워 떠들어댔는데 인환이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 때 배를 함께 탔던 선생님은 교감선생님으로 영어도 가르쳤다 한다. 그리고 배에 물이 차 들어오며 엔진이 꺼지니 재빨리 유빙으로 뛰어내린 사람 중의 하나가 같이 배 앞에서 얼음을 구경하던 친구였다고 했는데 그 사실도 나는 그날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인환이는 지금은 여든이 넘은 그 교감선생에게 몇 해 전에 세배를 드리러 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감선생님께 세배 드리고 나니 한 말씀 하시더라. ‘자네 형님 참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이야. 사실 그때 우리 작은 형님도 같이 갑제호를 탔었거든.
선생님의 말씀이 그날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다 작은 형이 수습하셨다는 거야. 구조선이라고 미군 배가 왔었는데 미군들은 그런 궂은 일에 모두 주저주저 했는데 작은 형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혼자 하셨다는데 난 그 일을 지금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그러시잖아.”
이 이야기에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그래? 형님이 같은 배 탔다는 것도 처음 듣는다. 그 형님은 금년 몇이신데? 뭐하시고?”
“형님은 나보다 열 살 위로 올해 일흔 셋이신데 교동에서 농사지으시다 교회 장로도 은퇴하시고 이제는 섬에서 작은 철물점 가게하고 계시지.”
“그래? 형님께는 지금이라도 인천시에서 표창을 해야 하겠구먼. 복 받으실 거야.
자, 자. 술 한 잔씩 채우고........
이제 출세한 촌놈 황인환의 앞날과 그리고 인환 형님의 평안하심을 위하여 건배하자.”
누군가의 건배제의에 모두는 채운 술잔을 높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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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광익님의 댓글
선배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저도 고향이 섬은 아니지만 시골인지라 (전 군자 촌놈이지요) 당시 열악했던 시골 환경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 집니다. 하지만 결코 고통만은 아닌 아릿한 그리움으로요...... 잘 읽었습니다. ^*^
윤용혁님의 댓글
이야기 보따리를 아주 맛갈스럽게 풀어 주시는 효철형님의 팬이 되었답니다.의인이신 인환 형님의 의로움에 숙연해지는군요.그리움이 넘치는 좋은 글에 마음두고 갑니다.자주 오세요.
劉載峻님의 댓글
모임의 총체는 강화 이야기로 시작해 강화 이야기로 마무리 하셨을 성 싶습니다 효철 선배님의 구수한 이야기, 유기현의 라디오 유명 연재물 전설따라 삼천리를 한 참 넘나듭니다 cyber 사랑방 개설에 많은 방청객이 있을 길조 吉兆 축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