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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낚싯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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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낚싯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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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난 손녀 현아와 두 살 백이 손자 영제가 낚시놀이를 하며 즐거워한다.
낡은 이본 우럭낚싯대의 끝대에 낚싯줄을 매어 자석이 들어있는 작은 플라스틱 약병을 달아놓아 꼬마 낚싯대를 만들고 물고기 모양으로 오린 두꺼운 판지에 클립을 달아놓으니 손자 손녀에게는 아주 신명나는 놀이 기구다.
이본 낚싯대는 끝대와 아랫대의 두 대를 연결해 아랫대에 릴을 장착해 사용하는 이 미터정도 길이의 낚싯대로 끝대 정도면 꼬마낚싯대로 손색이 없다.
손녀는 작년부터 이 꼬마낚싯대로 낚시 놀이를 해 와서 제법 능숙하게 고기를 낚아내며 깔깔거리는데 침대위에 올라 앉아 방바닥에 놓인 여러 마리의 판지 고기를 하나씩 달아 올리며 할머니에게 자랑이다. 옆에 앉아있는 할머니는 현아가 고기를 올릴 때마다 맞장구를 쳐주며 고기를 떼어 그 판지를 방바닥 다른 곳에 던져놓는다. 그러면 현아는 실증 날 때까지 한참동안 혼자 꼬마낚싯대를 즐긴다. 영제는 이본낚싯대의 다른 쪽인 아래 쪽 토막을 잡고서는 싱글벙글 방 이쪽저쪽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 굵은 대를 휘두른다. 돌 지난 지 석 달이 지난 영제는 걷기 시작한 지가 이제 두 달 정도인데 자기 몸에 비해 무거워 보이는 우럭낚시 밑 대를 용케 들고 신이 나서 걷는다. 그러다 누나가 들고 있던 꼬마낚싯대를 얻어 쥐고 나서는 대를 휘둘러 대는데 이건 보통 솜씨가 아니다. 줄 끝의 플라스틱 병이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며 영제 뒤 쪽에서 앞으로 날아 방바닥에 떨어지는데 그걸 본 오십년 조사인 내가 기가 막힌다.
“어머, 영제 봐. 할아버지보다 더 낚시 잘 하겠네.”
할머니도 영제의 그 모습에 놀라서 신기해하며 웃는다.
아들 가족과 같은 단독주택에 사는 지가 이 년이 훨씬 지났는데 직장 다니는 며느리 때문에 손녀를 돌보아주던 집사람은 이제 손자까지 두 애를 봐주느라 종일 정신이 없다.
보통 오후 여덟 시가 되면 아들이든 며느리든 퇴근해 집에 도착하기 때문에 아홉시 정도에 손주들을 인계인수해주고 집사람은 이층의 방으로 올라오는데 오늘은 아들 내외 둘이 다 늦게 온다고 연락이 와서 아래층에 좀 늦게 있다가 엄마를 기다리며 칭얼대는 현아를 달래 이층의 할아버지한테 놀러가자고 해서 손자인 영제까지 둘을 데리고 올라와 낚시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요새 이층 방에는 손주들 전용으로 바뀐 오래된 은성사 제품의 낡은 우럭대가 끝대와 밑대가 분리된 채 늘 한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진작 없어져야 할 수십 년이 된 고물 낚싯대가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따져보니까 그 낚싯대는 내가 제대하고 회사에 취업한 첫해인 1973년 12월에 열기낚시 간다고 큰맘 먹고 대구 시내 낚시점을 뒤져 바다용 스피닝 릴과 함께 마련했던 물건이니 나와 인연을 맺은 지는 이 달로 꼭 사십년이 되는 셈이다.
그때 그 릴은 언제 없어졌는지 기억도 없지만 그 낚싯대는 아직까지 내 곁에 가까이 있는 셈이다.
그 낚싯대의 첫 출조는 동해안의 주전이란 열기낚시의 명소로 경운기 엔진을 단 일 톤 정도의 작은 배에 네 명의 조사가 올라 바닷가에서 십여 분 정도의 거리에 나가 서너 시간 동안 엄청 많은 열기를 낚았다. 아이스박스도 없어 나일론 원료인 카프로락탐 포장용 비닐포대를 가득 채워 운반한 열기는 대구에 도착할 때까지 싱싱했다. 그날 저녁 대구 공장 숙소에선 열기 회 파티가 열렸고 그 자리에서 나는 동료들로부터 어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후로 그 낚싯대는 바다낚시 갈 때마다 거의 동행했는데 나중에 새 우럭대를 마련하고 나서도 낚시가방에 그 낚싯대는 언제나 한 자리를 차지했었다.도구 없이 동행하는 친구나 아들이 바다낚시에 동행하면 대부분 그 낚싯대를 사용했다.
대전에서 근무할 때 어느 여름휴가에서는 둘째와 같이 변산 반도에 가서 예약한 낚싯배를 탔을 때 아들 진성이가 그 낚싯대로 많은 수조기를 올렸고 군대 가기 며칠 전의 큰 아들과 변산에서 출발하는 우럭낚싯배를 타고 왕등도 일대에서 낚시할 때도 큰아들 진호는 그 낚싯대로 우럭을 낚았다. 마침 그 왕등도 조행 때에는 어느 스포츠신문 기자가 동행하여 아들의 낚시하는 모습을 찍어 신문에 실은 덕분에 그 낚싯대는 아들과 함께 매스컴을 탄 적도 있었다.
대전생활을 끝내고 수원으로 이사 온 후에도 자주 인천이나 태안으로 우럭낚시를 다녔는데 그때마다 그 낚싯대는 나와 늘 동행했지만 거의 가방신세였지 내가 직접 사용한 적은 없었다.
최근의 우럭대에 비해 무척 투박하고 칠도 많이 벗겨졌으며 최초 구입 시 멋있어 보이던 세라믹 링으로 장식됐던 가이드도 많이 상해버린 이 우럭 낚싯대는 사 년 전 동탄에서 살던 시절 초여름에 태안으로 우럭배낚시 갔을 때 동행했던 조카가 마지막으로 사용했었다.
조카는 그 낚싯대에 수동 장구통 릴을 장착하고서 우럭낚시 초보치곤 제법 능숙한 솜씨로 십여 마리의 굵은 우럭을 올리며 신나했는데 주위의 조사들로부터 그 낚싯대가 많은 시선과 관심을 받았다. 요사이 그렇지만 먼 바다 우럭낚시를 가보면 거의 다 전동 장구통 릴을 사용하기 때문에 수동 장구통 릴은 거의 보기 힘든데 수동 장구통 릴에다 투박한 고물 우럭대를 쓰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끝으로 그 낚싯대는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하게 됐다. 그날 대 끝의 가이드가 완전히 망가져 손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 낡은 걸 낚시점에 수리의뢰하기도 그렇고 해서 바다낚시가방에 그냥 처박아 놨었는데 동탄에서 여기 인천으로 이사 올 때 용케 낚시도구 틈에 섞여있었던 것이다.
인천에서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민물낚시도구는 아예 다른 사람에게 몽땅 가져가라 했으면서도 이 손때 묻은 낚싯대는 그냥 챙겨두었다가 이제 꼬마 낚싯대로 변신해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원래 이본낚싯대를 신품으로 구입했을 때 끝대는 굵은 대와 가는 대로 두 개였지만 가는 끝대는 벌써 없어진 지가 오래됐다.
그 가는 끝대도 두 아들의 꼬마낚싯대가 됐었다가 없어졌다.
큰 아들이 초등학교 다니던 하계동 아파트 시절에 두 아들들이 그 꼬마낚싯대로 아파트 배란다의 벽돌 연못의 향어를 낚아내고선 좋다고 난리치던 것이 그 가는 대의 마지막 기억이다.
베란다의 벽돌연못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하계동 아파트 베란다에 붉은 벽돌 백장(정확히는 열여섯 장을 한 단으로 다섯 단을 올렸으니 팔십 장이다.)을 쌓아 사 단까지는 비닐을 펴서 둘려놓고 그 위에 벽돌을 한 단 더 올려놓아 미니 연못을 만들어 고기를 길렀는데 물이 반 드럼 정도 들어가는 제법 그럴듯한 연못이었다. 베란다의 수도꼭지에 카본 카트리지필터를 연결해서 수돗물을 카본으로 정수되는 그대로 가는 호스를 통해 갈아주고 공기로 여과되는 수중펌프에 필터까지 설치했으니 연못의 수질은 전문 수족관의 수질보다 훌륭했다. 실제 근처의 수족관 사장이 그 연못을 보고는 감탄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연못 안에는 사다 넣은 고기보다 낚아 온 고기가 더 많았는데 당시 유행이던 실내 낚시터에서 낚은 향어 두 마리도 그 연못에서 잘 지내다가 아들들의 꼬마낚싯대에 그만 봉변을 당한 셈이다. 당시 두 아들은 아빠와 함께 실내낚시터에 여러 번 다녀온 터라 향어낚시는 그렇게 어려운 놀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결혼 하고서 하계동까지 열 번 정도 이사 했었고 그 이후로도 구미로 서울로 대전으로 수원으로 또 여기저기로 이사해 인천 이곳까지 십여 차례 더 집을 옮겼는데 총각 때의 내 물건이 그 북새통에 아직까지 내 곁에 있기는 그 낚싯대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언젠가 신혼살림 중 아직 남은 살림이 있나 살펴봤더니 딱 한 가지 있는 걸 확인 했는데 지금 골방 한 구석에 있는 낡은 옷걸이여서 우리 부부는 그 사실을 알고 한참이나 웃은 기억이 난다.
그 옷걸이도 버릴까 했다가 우리 부부에게는 의미가 있는 물건이라 해서 그 후 이삿짐에 꼭 챙겼던 것 같이 그 고물 낚싯대도 앞으로 계속해서 내 곁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도 아비 닮아 낚시를 좋아하는데 손자까지 낚시를 좋아한다면 언제쯤 한 번 삼대가 낚시를 함께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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