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실
괴상망칙한 시계들
본문
아마도 사법부는 쿠르베의 그림이 결코 음란하지
않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국제적 망신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면 우리사회에서 음란의 기준은
적어도 성기나 음모노출 유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욕망해소용 사진과 영상물을 창작해 내는
성인업자들은 해당되지 않는 기준이다.
진중권은 '성의 미학' 서두에서 '포르노그래피가
배를 채우기 위한 패스트푸드라면, 에로틱 예술은
잘 차려진 정찬이라는 말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같은 음식이지만 현격한
품질의 차이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성의 미학'에서 거론하고 있는 에로틱 예술엔
결정적인 아쉬움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성이라는 소재를 떠나서 오래됐기 때문에
마치 예술이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든다는 것이다.
포르노 사진작가가 주류예술세계로 진입하고 있는 현실과
비교해보면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시선이라는 것이다.
포르노그래피와 에로틱 예술의 차이가 아니라 지금은
포르노그래피 중에서도 예술을 발견할 수 시대가 아닐까.
같은 포르노라도 작가에 따라서 사진과 영상물이
주는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외국의 한 블로거는 음란한 시계 이미지들을 잔뜩 모아놓았다.
시계의 디자인을 보면 요즘 것이라기 보다는
구제 냄새가 확실하게 풍긴다.
누가 언제 이런 시계들을 만들었는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천천히 들여다보면 단지
시계 이상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시계 속에 그림과 조각으로 채워넣은 성풍속도들은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을만한 수준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음란한 고객을 위해 고민끝에 만들어 냈을
음란한 시계는 시계공들의 엄연한 창작물임이 틀림없다.
여자의 팔자는 남자에 달린 것처럼 어쩌면
이 시계들의 운명 역시 언제나 예술과
조악한 음란물의 갈림길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있다? 없다?' 단언할 수 없지만 예술이란 실체가
어렴풋이 물컹거리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성을 소재로 창조해내는 수많은
부산물들은 경계가 모호하기 마련이다.
여자의 몸을 로프 하나로 잘만 묶어도 예술이요.
포르노에서 얼굴 위에 수없이 흩뿌려진 정액은
알아보기 힘든 추상화보다 더 강렬할 때도 있다.
만약 예술을 앞세워 음란 앞에서 당당할 수있다면
적어도 그 음란함을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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