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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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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봄
안길원 동창회장님이 취임을 하고 전 동문이 참석할 수 있는 등반대회를 동문산악회 주관으로 치르게 되었다.
당시 동문산악회 회장은 우리 73회 동기인 이상명 군이다.
행사 일주일 전 이상명 회장과 둘이서 등반장소인 영종도 백운산을 답사하고 왔다.
모든 준비를 하던 중 대통령배 준준결승이 그날과 겹쳐졌다.
버스 20대를 준비한 그 날 결국은 동대문구장으로 향한다.
결국, 그 게임과 다음 게임 그리고 결승에서 승리하여 대통령배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2004년도 늦은 봄
총동창회 사무국에서 홈페이지제작 준비위원회를 만들어 홈페이지 제작을 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물론 제작은 제작업체에서 하지만 홈페이지의 컨셉을 잡아달라는 주문이다.
80기수 중심으로 홈페이지에 관심 있는 동문 10여 명을 섭외하여 위원회를 만들었다.
3층 도서실의 회의실에서 여러 번 만나 의논하고 구상하여 뼈대를 만들었고 제작업체 세군데를 선정하여 견적을 의뢰하고 가격을 협상 한 끝에 74회 심상학 동문이 운영하는 제작업체가 선정되었다,
2,200만 원의 가격으로 계약하였으나 안길원 회장님께서 1,900만 원으로 다시 협상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연히 안길원 회장님이 비용을 지급했다.
당시 위원들과 가끔 밥 먹고 술 마시는 것을 사무국이 아닌 자비로 지불했었다.
그때는 서무국에 들어가는 것도 불편했고 사무국에 비용을 지불해 달라고 하질 못했으니까^^
2005년 봄
총동창회 행사가 있으니 같이 일하자고 한다.
인천사랑 걷기대회
하루인가 이틀 전 참석하여 현수막 걸고 인원통제 등등
재미있게 행사를 치렀다.
2005년 가을
30개 기수 합동체육대회를 모교 운동장에서 치른단다.
또 호출이다.
이성수 66회 회장님을 운영위원장으로 하고 72회 이종학 선배께서 부위원장이 되어 행사를 준비한다.
이러한 행사는 좀 자신이 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2년간 73회 기 회장을 하면서 쌓아 온 노하우가 있다.
73회 졸업생이 320명인데 1992년 송년회에 109명이 참석했다.
졸업 19년째이니까 주년행사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정원의 1/3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다.
당시는 부부동반도 없었다.
다만 고 3학년시절 담임선생님 6분 교련선생님 1분 김세기 교장 선생님 1분 중학교 때 안광길 유도선생님 (야마모도) 1분 이렇게 9분의 선생님을 모시고 동기생 109명이 송년회를 치렀으니까 총원 118명인 셈이다.
물론 그 이후로는 100명을 넘긴 적이 없다.
먼저 로드맵을 짜고 행사에 필요한 물건과 비품 등 초청인사, 좌석배치, 프로그램, 상품(상품은 말로만 준 경우가 있어 세탁기부터 마티스 자동차까지 현품으로 비치하였다.)
승용차나 고급상품도 흔히들 하는 짜고 치지 않았다. (미리 누구에게 주기로 하는 것)
모든 모임은 신뢰가 중요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모임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승용차는 81회 동문인데 잘 나오지 않던 동문이 탔다.
큰 행사를 잘 치러내었다.
2005년 12월 12일
인천야구 100년사 발간기념회 날이다.
한 달 전부터 동기 박홍규 군을 비롯한 준비위원들과 문화예술회관 좌석배치도를 들여다보면서 행사준비를 한다.
모든 행사 때 좌석이 비면 썰렁하기 그지없다.
인천시장과 인천의 국회의원, 각급 동창회 회장단, 많은 우리 동문
많은 인원 참석으로 성시를 이룬 채 성황리에 끝났다.
매번 행사마다 그랬듯이 내가 비용을 관리했고 회계와 모든 자료를 맞추어 사무국에 내용이 담긴 CD를 전달하면 끝이 난다.
다음 날인 12월 13일 일찍 모든 상황을 정리하여 사무국에 인계하고 도망치듯이 나온다.
10월 20일경부터 사무국장 자리가 공석이라 사무국장을 구하고 있단다.
지금 내 이름도 사무국장 살생부에 올라가 있단다.
아니나 다를까 12월 하순경에 황중석 수석부회장께서 전화하셨다.
이리저리 도망 다닐까 하다가 정면 돌파하기로 한다.
주안역 앞의 어느 식당에서 버섯 찌개로 점심을 먹으며 사무국장 이야기를 하신다.
단호하게 거절한다.
월급을 사무국에서 100만 원, 안길원 회장이 100만 원 합 200만 원을 주겠다고 하신다.
“저는 3월에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가 1년 넘게 있어야 합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내 고집도 보통은 넘는다.
“알겠네.”
“죄송합니다.”
내 성격이 어디 매여 있는 것, 그리고 내 마음대로 못하고 끌려다니는 것이 싫어서 무슨 일을 하게 되면 먼저 완벽을 기해 미리 해 버린다.
하물며 사무국장 자리가 얼마나 매여 있고.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자리인데. 그런 자리는 생각하기도 싫다.
잘 넘어갔다.
2005년도 끝이 났고 2006년이 되었다.
2006년 1월 초순경 대선배인 길재환 전 사무국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조금 긴장된다.
길재환 선배님은 1993년 음력 2월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적에 당시 총동창회 사무국장으로 근무하실 적에 문상을 오셨었다.
내가 73회 회장을 맡았을 적이라 부친상에 오신 것이다.
“네 이상호입니다”
“응 나 62회 길재환이야.”
신포동 사무실에서 한번 보자고 하신다.
다음 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신포동 사무실로 향했다.
내용은 역시 동창회를 위해서 봉사를 해 달라 하신다.
단단히 먹은 마음으로 어렵게 거절을 하고 나왔다.
평소 먼발치에서만 뵈었던 항상 어려운 선배님이시고, 가까이 뵌 적은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냐 내가 미안하지.”
“그건 그렇고 69회 장재섭이랑 한번 경남횟집에서 민어나 먹지?”
장재섭 선배는 평소 산에서 자주 뵈었고 컴퓨터부문의 전문가라 대화가 잘 통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황중석 부회장께서, 체육대회 등 각종 행사에 일하고 있던 나를 잘 보았고, 길재환 선배님께 내 이야기를 하셨고 나를 잘 모르시니까 장재섭 선배님께 이상호가 어떤 사람인가 물어보셨단다.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며칠 후 저녁때 경남횟집으로 나오라 하신다.
경남횟집에 두 분 선배님과 술은 한잔 하였다.
장재섭 선배님이 계셔서 조금은 편했다.
이렇게 술이 3병을 넘어 4병으로 가는데 두 선배님께서 술잔을 안 드신다.
기다리다가 잔을 들고 “한잔 드시죠.” 하였더니
길재환 선배님께서
“우리는 자네가 사무국장 한다고 하기 전까지는 안 마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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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으로 20분이 지났다.
선배님들 두고 그냥 집에 갈 수도 없고
술잔을 앞에 두고 20분 이상 말이 없으면 사람 미친다.
선배님들이 나보다 많이 준비하셨다.
그래도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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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너졌다.
“그러면 제가 안길원 회장님 임기까지만 하겠습니다.”
5월에 정기총회고, 새로운 회장님 오시면 물러날 궁여지책을 쓴 것이다.
인수인계까지 5~6개월이면 충분하다는 나만의 생각이었다.
“그래 고마워”
일단은 이렇게 넘겼으나 입안은 답답하다
“그리고 자네 건물 임대업 한다지?”
“예”
“그러면 무급 봉사하도록 해”
“돈을 받아가며 봉사하면 봉사의 공이 빛이 나질 않아”
당연히 돈에 대한 욕심이 있었으면 황 부회장님 제안을 수락했겠지.
길재환선배님도 사무국장 시절 오랜 기간 무급봉사하셨고 후배들에게 술도 많이 사 주셨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었다.
나도 성격상 돈에 후둘리고 싶지는 않다.
“네 알겠습니다.”
이래서 2006년 1월 20일부터 사무국에 출근하게 된다.
이후 길 선배님과 장 선배님이 자주 신포동으로 부르신다.
그 외 몇 분이 더 자리하시기도 하고
두 선배님은 항상 “강제로 사무국장 시켜서 미안해”라고 하신다.
이런 자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다 보니 한 달에 한 번 날짜를 정해놓고 만나게 되는데 첫 번째 금요일에 만나가로해서 일금회라고 지었다.
예전에 자주 만나던 모임이 주축이 되었고 만나는 동문 선후배가 산에 같이 다니면서 가까워진 사람들이다.
10명 중 전임 동문산악회 회장이 5명이라는 것이 말해 주듯이
사무국 근무를 시작하니 내 기준으로 보니 모든 것이 엉망이다.
먼저 회원 주소를 보니 거의 1/3이 틀린 주소이다. (73회 주소록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동창회보를 1만 부 정도 보내고 나면 2,800부 정도가 반송된다.
동창회 활동에 기본이 되는 주소정비와
엑셀로 출석부 집계를 내고(자동집계)
역시 회비종합도 엑셀로 누계를 잡고
버릴 것 버리고 모든 서류 분류하여 정리하고(여직원이 일하는 서류가 아님)
성격상 그런 것을 그냥 놓아두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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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0
이동열님의 댓글
수고 많으셨네,,,몇몇가지 나와 의견이 안맞는 것도 있어 그떄는 논쟁도 했지만 지나고 나니 우리가 그땐 열정이 많아서 였겠지,,? 홈피를 진짜 오랫만에(비번두 까먹었음,,ㅋㅋ) 들어와 보니 많이 시끄럽구먼,,,잘 마무리되었음 좋겠네요^^ 화이팅~~!!!!
이광열님의 댓글
누가 보아도 봉사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무급으로 6년 7개월간 사무국장을 역임한것은 모교와 모교동창회를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쓴 것일 것이다. 상호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