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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인천공립상업학교 28회 졸업생 정홍택 옹
작성자 : 이덕호
작성일 : 2005.07.26 08:51
조회수 : 1,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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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 인천일보(05. 7.26)
<인물>인천공립상업학교 28회 졸업생 정홍택 옹
<인물>인천공립상업학교 28회 졸업생 정홍택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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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8월 충북 영동경찰서는 기차 정거장에 서 있던 한 여학생의 가방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한다. 이 편지는 일본 명지대에서 유학중인 송재필이 같은 기인 김정일에게 보낸 것으로 ‘학도병을 반대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곧바로 김정일이 경찰에 붙잡히게 되면서 인천공립상업학교(이하 인상) 학생들이 만든 비밀조직인 ‘오륜조’(五倫組)의 정체가 드러난다. 이로 인해 인상 28회 졸업생 24명이 구속되고, 이 중 4명이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하기에 이른다.
‘오륜조’는 1936년 인상 1학년에 재학중인 정홍택(85·정귀택), 안학순(한국전쟁 중 사망), 홍사성(83), 추중호(4학년 때 병사) 등 4명이 항일을 목적으로 만든 비밀조직이다.
당시 일본인 학교인 인천남상학교와의 통합으로,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 학생들과 잦은 충돌을 빚었다. 일본인들의 오만과 우월감이 심해, 조선인 학생을 무시하고 천대했다. 학교 당국은 이를 방조하다 못해, 눈에 보이게 조선인 학생을 차별했다.
정홍택씨는 “당시 교장이었던 야모모토 세이세이(山本正誠)의 조선인 차별대우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며 “전교생 앞에서 조선인 학생을 불러세워 면박을 주는 일은 다반사였고, 일기장을 검열하다 맘에 들지 않는 문구를 발견하면 꼭 불이익을 줬다”고 말했다.
분노에 찬 젊은 학생들은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결의했고 “실력을 양성해 새나라의 초석이 되자”며 굳게 뭉쳤다. 그것이 바로 오륜조다.
오륜조는 조선인 학생들을 규합, 학년별, 고향별 친목회를 만들어 ‘창씨개명’과 ‘지원병’에 반대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학교의 탄압이 만만치 않았다. 창씨개명을 하지않는 학생들에게는 졸업장을 주지않고, 취업알선도 해 주지 않았다.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정씨는 결국 졸업장을 발급받지 못했다.
조선인 학생 친목회는 조선인 학생들만의 졸업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 일이 후에 친목회 회원들을 탄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보였고, 1941년 3월 졸업한 오륜조는 젊은이들에게 ‘학도병 반대’를 전파했다. 회원들간에 정보교환도 수시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상도 입에서 입으로 전파됐다.
송재필의 편지가 발각되면서, 일경은 제일 먼저 오륜조의 핵심이라고 여긴 정홍택을 체포했고, 이어 오륜조와 친목회 회원들을 하나 둘 붙잡아들였다.
정씨는 “악명높은 이근안의 고문기술은 비교할 바 않된다. 전기고문에 물고문은 기본이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머리맡에 고추와 쑥을 섞어 태우면 호흡을 하지 못해 기절한다. 가죽회초리로 맞아 등이 부어올라 누울 수 조차 없었다. 겨울에는 새벽 1∼2시까지 고문이 이어지기도했다. 억지로 자백을 받아냈다”고 증언했다.
1944년 6월 대전형무소로 송치된 이후, 고문후유증과 영양실조로 4명이 옥사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했고, 이들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지만 이어 11명이 후유증에 유명을 달리했다. 전쟁을 겪고, 세월이 지나면서 24명의 구속자 중 지금은 정씨와 홍사성씨 등 3명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정씨는 국가보훈청에 국가유공자 서훈을 신청해 놓고 회신을 기다리고 있다. 옥중 사망자 중 3명에 대해선 1986년 건국훈장애족장이 수여됐지만 나머지 연루자는 서류 미비나 근거자료 부족 등의 이유로 서훈 대상에서 제외됐다.
글·사진=김주희기자/blog.itimes.co.kr/kimjuhee
종이신문정보 : 20050726일자 1판 12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5-07-25 오후 6:33:54
곧바로 김정일이 경찰에 붙잡히게 되면서 인천공립상업학교(이하 인상) 학생들이 만든 비밀조직인 ‘오륜조’(五倫組)의 정체가 드러난다. 이로 인해 인상 28회 졸업생 24명이 구속되고, 이 중 4명이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하기에 이른다.
‘오륜조’는 1936년 인상 1학년에 재학중인 정홍택(85·정귀택), 안학순(한국전쟁 중 사망), 홍사성(83), 추중호(4학년 때 병사) 등 4명이 항일을 목적으로 만든 비밀조직이다.
당시 일본인 학교인 인천남상학교와의 통합으로,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 학생들과 잦은 충돌을 빚었다. 일본인들의 오만과 우월감이 심해, 조선인 학생을 무시하고 천대했다. 학교 당국은 이를 방조하다 못해, 눈에 보이게 조선인 학생을 차별했다.
정홍택씨는 “당시 교장이었던 야모모토 세이세이(山本正誠)의 조선인 차별대우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며 “전교생 앞에서 조선인 학생을 불러세워 면박을 주는 일은 다반사였고, 일기장을 검열하다 맘에 들지 않는 문구를 발견하면 꼭 불이익을 줬다”고 말했다.
분노에 찬 젊은 학생들은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일본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결의했고 “실력을 양성해 새나라의 초석이 되자”며 굳게 뭉쳤다. 그것이 바로 오륜조다.
오륜조는 조선인 학생들을 규합, 학년별, 고향별 친목회를 만들어 ‘창씨개명’과 ‘지원병’에 반대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학교의 탄압이 만만치 않았다. 창씨개명을 하지않는 학생들에게는 졸업장을 주지않고, 취업알선도 해 주지 않았다.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정씨는 결국 졸업장을 발급받지 못했다.
조선인 학생 친목회는 조선인 학생들만의 졸업앨범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 일이 후에 친목회 회원들을 탄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보였고, 1941년 3월 졸업한 오륜조는 젊은이들에게 ‘학도병 반대’를 전파했다. 회원들간에 정보교환도 수시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상도 입에서 입으로 전파됐다.
송재필의 편지가 발각되면서, 일경은 제일 먼저 오륜조의 핵심이라고 여긴 정홍택을 체포했고, 이어 오륜조와 친목회 회원들을 하나 둘 붙잡아들였다.
정씨는 “악명높은 이근안의 고문기술은 비교할 바 않된다. 전기고문에 물고문은 기본이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머리맡에 고추와 쑥을 섞어 태우면 호흡을 하지 못해 기절한다. 가죽회초리로 맞아 등이 부어올라 누울 수 조차 없었다. 겨울에는 새벽 1∼2시까지 고문이 이어지기도했다. 억지로 자백을 받아냈다”고 증언했다.
1944년 6월 대전형무소로 송치된 이후, 고문후유증과 영양실조로 4명이 옥사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했고, 이들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지만 이어 11명이 후유증에 유명을 달리했다. 전쟁을 겪고, 세월이 지나면서 24명의 구속자 중 지금은 정씨와 홍사성씨 등 3명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정씨는 국가보훈청에 국가유공자 서훈을 신청해 놓고 회신을 기다리고 있다. 옥중 사망자 중 3명에 대해선 1986년 건국훈장애족장이 수여됐지만 나머지 연루자는 서류 미비나 근거자료 부족 등의 이유로 서훈 대상에서 제외됐다.
글·사진=김주희기자/blog.itimes.co.kr/kimjuhee
종이신문정보 : 20050726일자 1판 12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5-07-25 오후 6:3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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