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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조우성(시인, 65회)-왜 ‘松島 부활’ 앞장 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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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05. 7. 4)
왜 ‘松島 부활’ 앞장 서나
- 송도는 식민지시대 유물
“어운(語韻)도 그리운손 인천 새 동명(洞名)” “순수한 조선색(朝鮮色)의 76개 동(洞)” “신년부터 완전히 왜취(倭臭)를 말살하자!”
1945년 12월 23일자 대중일보(大衆日報) 2면의 톱기사 제목이다. 이날 인천 최초의 국문신문인 대중일보는 일제가 인천 땅에 제멋대로 박아놓은 ‘언어의 쇠말뚝’(일본식 지명)을 인천시(仁川市) 당국이 마침내 뽑아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신문은 “8.15해방 이후에도 아직 거리에는 가증스럽고 더러운 왜색이 일소되지 못하고 국치적(國恥的)인 정명(町名)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한심스러운 일이었다.”고 전제하고, 이에 따라 시 당국은 “정명개정위원회(町名改正委員會)를 조직해 수차 협의한 결과 ‘정(町)’을 ‘동(洞)’으로, ‘정목(丁目)’을 ‘가(街)’로 개칭해 46년 1월 1일부터 시행키로 했다.”고 전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인천시가 새로 정해 발표한 76개 동명을 여기서 다 소개할 수는 없으나 왜색이 짙은 대표적인 예를 몇몇 든다면 다음과 같다.
송도정(松島町)-옥련동(玉連洞), 도산정(桃山町)-도원동(桃源洞), 소화정(昭和町)-부평동(富平洞), 대정정(大正町)-계산동(桂山洞), 산수정(山手町)-송학동(松鶴洞), 궁정(宮町)-신생동(新生洞), 부도정(敷島町)-선화동(仙花洞), 산근정(山根町)-전동(錢洞), 명치정(明治町)-부개동(富開洞), 운양정(雲揚町)-백석동(白石洞), 이등정(伊藤町)-구산동(九山洞) 등.
이처럼 일제가 순일본식 지명(地名), 인명(人名), 연호명(年號名), 사건명(事件名), 시대명(時代名) 등을 인천 땅에 박아놓은 것은 순전히 제국주의적 야욕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1933년에 발행한 ‘인천부사(仁川府史)’에서 그 같은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다. 1907년 5월 13일 인천 일본영사관 소속 ‘노부오’ 이사관이 본국 총무장관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면 그 사정을 익히 알 수 있다.
“인천 시가(仁川市街)의 명칭은 종전대로의 통칭 혹은 땅문서상의 호명으로는(중략) 불편이 적지 않아 이번에 인천 시가 전부를 우리 마을 이름(일본식 지명을 말함-필자 주)을 붙이게 되었다.(중략)우리 마을 이름을 명하는 것은 다소 온당치 못한 점이 있지만,(중략)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일반의 호칭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로 미뤄 보면, 일제는 한일병합 이전인 1907년에 이미 이 땅에서 집요하게 식민화를 획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도 일본식 지명 박기 작업이 온당치 못함을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의식의 밑바닥에서부터 인천을 일본화(日本化)하려 했던 저의에서 그 같은 만용을 저질렀던 것이다.
명명(命名)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 사정을 쉬 알 수 있다. 송도정(松島町)이 명백한 왜색 지명이라는 것은 재론삼론(再論三論)한 바 있어 언급하지 않겠거니와, 도산정(桃山町)은 일본인들이 조선 침략의 원흉인 풍신수길과 그의 시대를 기려 ‘도산시대(桃山時代)’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영 밥맛 떨어지는 지명이며, 거기에 일본의 왕호(王號)이자 연호(年號)인 명치정, 대정정, 소화정은 또 무엇이며, 운양호 사건을 연상케 하는 운양정, 일본인의 성(姓)을 딴 이등정에 이르면 가히 가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1946년 당시 인천시는 지역 사회의 식자(識者)들을 초치해 정명개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왜식 정명’ 대신 ‘조선색(朝鮮色)과 어운(語韻 말의 가락)’을 살린 우리식 동명(洞名)을 새로 짓게 해 이를 공식적 법정동 명칭으로 시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오늘, 인천시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지난날의 바른 행정(行政)을 뒤집어 신도시의 이름을 ‘송도국제도시’, 그 지역의 동명을 ‘송도동’이라 하여 ‘송도(松島)’ 부활에 앞장서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신도시’를 ‘송도(松島)’라 부른 이유인즉, 과거부터 민간이 그 일대를 그렇게 불러와 널리 알려졌다는 것인데, 그 과거라는 것이 기껏 1937년이요, 그 명명자(命名者)가 일본인이며, 그 의도가 인천의 식민지화였음은 명명백백한 사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송도'를 관철시킨 것은 1946년 인천의 선대들이 ‘송도정’을 ‘옥련동’으로 바꾸었던 ‘왜취말소(倭臭抹消)’라는 취지와도 정면 배치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국가 화두인 ‘친일 청산’과도 빗가는 일이며 본질적으로는 인천의 역사성, 정체성까지도 흠집 낼 수밖에 없는 착오인 것이다.
인천시는 이 문제에 관한한 괜한 고집을 피울 일이 아니다. 일의 시비와 경중과 선후를 차분히 가리지 못하고 의욕만을 앞세워 (1)‘송도국제도시’가 이미 ‘브랜드’로서 세계에 알려졌다(그러나 신도시는 이제부터가 출발이란 게 일반적 인식이다) (2)복잡다단한 행정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행자부 승인보다 더 큰 행정적 절차가 무엇일까) (3)개정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든다(비용이 들 것은 불문가지. 그러나 이는 비용 문제가 아니다) 등 여러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한다면 먼 훗날까지 두고두고 탈을 남기는 우를 범하게 될 게 번연한 것이다.
어쨌든 ‘신도시’는 여러분의 노고에 의해 화려한 문을 열 것이다. 그러나 그 도시에서 삶과 꿈을 영위할 진정한 ‘신도시’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우리 고장 인천의 2세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자손손 21세기 초 ‘신도시’를 건설했던 선대 인천인들을 추억하며 우리 인천을 ‘동북아의 중심 도시’로 키워 나갈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우리가 미래의 주역인 그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지 못해 일제의 식민지 잔재를 되살려 유산으로 전해 주겠다는 것인가? 부디 ‘송도(松島)’란 지명이 일본인들조차 ‘우리 마을 이름’이라고 자인한 치욕적 역사의 유물임을 명지해 주기 바란다.
종이신문정보 : 20050704일자 1판 4면 게재
인터넷출고시간 : 2005-07-03 오후 5:3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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