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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경제·사회계 발전사 ‘큰 별’ 이기상 영진공사 대표회장 별세(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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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기호일보(16.12.20)
인천 경제·사회계 발전사 ‘큰 별’ 이기상 영진공사 대표회장 별세
향년 80세… 내일 발인
인천 경제·사회계의 큰 별이 졌다. 이기상 ㈜영진공사 대표회장이 19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0세. <관련 기사 3면>
고인은 1961년 3월 인천 토종 기업인 영진공사를 세웠다. 인천항 하역과 바닷모래 채취에 나서면서 국내 중견 물류종합회사로 성장의 발판을 닦았다.
고(故) 이기상 회장은 1977년부터 중동 바레인의 항만과 공항 물류업에 진출해 해외 취업과 외화벌이를 이끌었다. 남항에 인천항 최초로 민자부두를 건설해 체선 감소와 대기시간 단축 등을 통해 갑문항의 한계 극복을 시도했다. 평택항 서부두 운영도 참여하고 있다. 자산총액 1천452억 원인 영진공사는 인천항을 중심으로 연간 200여만t의 화물을 처리하면서 연간 920억 원가량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 물류종합기업으로 성장했다. 항만 하역뿐만 아니라 화물 운송과 창고보관업 등 종합물류시스템을 갖췄다.
이기상 회장은 1990년대 ㈔한국항만협회와 한국항만연수원 이사, 인천항만물류협회 회장을 맡았다. 인천항만공사 항만위원회 초대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특히 인천체육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직할시 시절인 1980년 인천야구협회 회장과 체육회 이사, 세계야구대회 인천경기 준비위원회 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2002년에는 인천 프로축구단 창단을 위한 범시민추진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역할을 했다.
인천시의회 초대 의원과 의장을 맡았던 이기상 회장은 지역사회의 현안 해결에도 적극적이었다. 1997년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고수습 범시민대책위원회 위원장과 인천항 제2연륙교 관련 범시민대책위원회 공동대표, 대한적십자사 인천시지사 제8·9대 회장 등 지역사회 리더의 삶을 살았다.
고인의 빈소는 인천길병원 장례식장 특실(☎032-460-3444)이다. 발인은 21일이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2016년 12월 20일 화요일 제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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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면한 이기상 영진공사 대표회장은?
인천경제 발전 돛 올리고 외항시대 개척한 선구자
고(故) 이기상 영진공사 대표회장은 반세기 인천항을 지켜온 주역이자 산증인이다. 연세대를 나와 항만 현장을 경험하다 미 8군의 군수물자 하역을 맡아 먼저 세상을 떠난 고 이기성 회장을 도와 1961년 합자회사를 설립했다. 이듬해 주식회사로 변경해 지금의 중견 물류종합회사로 성장해 온 영진공사는 중동과 중국·러시아까지 영역을 확대하며 해외 취업과 외화벌이로 인천 경제를 견인해 왔다.
특히 이 회장은 1970년대부터 해외시장 개척 전면에 나서 본격적인 외항시대를 열었다. 그동안 인천내항에 머물러 있던 다른 하역회사들도 이 같은 이 회장의 광폭 행보에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영진공사는 국내 물류기업으로는 최초로 1977년 바레인에 진출해 국제공항 지상조업과 미나슐만항 화물 처리를 도맡았고, 2006년 기준으로 연매출 100억 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 중국과 국교 수립 이전인 1991년부터 위동항운과 협력해 대중국 화물 하역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2005년 국제복합운송주선업종인 ㈜영진GLS를 설립해 러시아와 몽골에까지 영업을 확대하고, 중국 칭다오(靑島)에 국제물류단지를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한중 FTA 체결을 염두에 둔 이 회장의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다.
이 모든 일은 운동선수 출신인 이 회장의 뚝심과 외골수적인 기질이 있어 가능했다. 영진공사가 지역의 대표 향토기업으로 성장해 오기까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바다산업과 항만 발전 없이는 인천의 미래도 없다"고 평소 자주 말해 온 그가 19일 인천경제에 큰 족적을 남기고 향년 80세로 영면했다.
배종진 기자 jongjb@kihoilbo.co.kr
2016년 12월 20일 화요일 제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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