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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철(65회) /그해 그 추운 겨울바다의 기억(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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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철
- 이효철 / 실버미추홀신문 기자
1963년 초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죽 추웠으면 그 겨울에 인천항이 꽁꽁 얼었을까. 당시 내가 인천항이 개항 80년 만에 결빙됐다는 소식은 알게 된 것은 신문 기사를 통해서였다. 그 소식은 사회면에 비교적 비중 있는 기사로는 보도된 것으로 기억하데, 신문 생생한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대부분의 사람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기사뿐인 그 소식을 접하고 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과연 인천 앞바다가 신문에서 보도한 것처럼 얼었을까? 곰곰이 따져보니 지난 보름 정도에 걸쳐 최저 온도가 영하 15도 부터 영하 20도 정도였으며, 한낮의 최고 기온도 거의 영하 10도 정도였던 것을 분명히 기억해내고 보니 근년에 그런 추위는 없었음이 틀림없다.
“아무리 그렇다고 바다가 얼어?” 호기심이 나니 참을 수가 없어 당장 얼어있다는 그 바다를 보러 나는 홀로 그 추운 한낮 인적도 거의 없는 자유공원에 올라갔다. 공원 팔각정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과연 바다가 얼어 있었다. 보이는 모든 바다가 얼어있었다. 장관이었다.
월미도와 축항 사이의 내항은 물론 작약도 너머 영종도까지의 외항도 얼어있었다. 몇 척의 외항선이 월미도와 영종도 사이의 얼음바다 위에 정박해 있었는데 내항이나 외항 그 어디서나 어떤 움직임도 볼 수 없는 고요만이 인천항에 쌓여 있었다.
내항에 큰 배가 출항하여 깨어졌던 얼음들이 다시 얼어붙은 흔적이 보였는데 가끔 축항에 입항하는 수천톤급 미군 군용화물선이 출항해서 남긴 자취인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이나 그 모습을 보고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공원을 다녀온 며칠 후 끊겼던 뱃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뱃 시간에 맞추어 인천 부두에서 아버지와 함께 강화행 여객선을 타게 되었다.(강화대교는 1965년 착공해 1970년 개통됐다) 아침 일찍 부두에 도착하여 강화행 배에 올라보니 바다는 역시 꽁꽁 얼어있었다.
당시 인천에서는 ‘황보호’라는 이름의 목제 기선이 인천에서 강화 남단의 초지를 거쳐 갑곳까지 운항되고 있었는데 황보호는 승객을 300백 명 가까이 태울 수 있는 인천 부두에서는 제법 큰 여객선이었다. 출항을 위해 엔진을 달구고 있는 배안에는 많은 승객이 선실를 메우고 있었는데, 얼음바다에 관심이 많은 나는 선실 밖으로 나와 배가 항구를 떠날 때부터 목적지 초지에 도착할 때까지 두어 시간 동안 내내 갑판에서 모든 광경들을 지켜보았다.
“사방으로 빈틈없이 얼어붙은 배가 과연 어떻게 움직일 수 있으며 안전하게 항해하여 목적지인 초지까지 갈 것인가.” “가까이서 보게 될 먼 바다의 언 모습은 어떨까.”
드디어 엔진이 걸리고 스크루가 돌기 시작했다. 처음 깨지기 시작한 얼음은 스크루가 돌고 있는 배 뒤쪽의 얼음이었다. 잠시 후 스크루가 전진 후퇴의 작동을 몇 번 반복하니 황보호는 옆에 얼음이 잔뜩 붙어있는 체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는 힘겹게 얼음판을 헤집어가며 서서히 내항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는데 얼음 두께는 어림잡아 한 뼘 내외로 기억된다. 내항을 어느 정도 지나니 배 옆에 붙어있던 얼음들이 모두 떨어져나갔다.
소월미도를 돌아 외항으로 나와 작약도 쪽으로 향하면서부터는 얼음 두께도 조금 얇아져 황보호는 조금 더 속도를 올리기 시작 했지만 평소의 속도보다는 차이가 나게 느린 속도였다. 바다는 깨끗하게 얼어붙은 호수처럼 반 뼘 정도의 판판한 얼음판으로 덥혀 있었다.
얼음 두께가 얇아지고 배의 속도가 오르고 나니 뱃전의 얼음이 깨어지면서 그 조각들이 빙판 좌우로 튀기 시작하는데 멀리 튀는 것은 제법 멀리 미끄러져 나간다.
가끔 피할 수 없는 유빙이 배 앞에 나타나면 황보호는 스크루를 멈추어 속도를 줄여 그 유빙을 천천히 밀어낸다. 유빙이 배와 부딪치는 순간은 배가 약간 흔들려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충격을 전해왔다.
또 배 옆의 다른 유빙들은 배가 지나는 물결에 부딪쳐도 처음에는 그대로 가만히 있으나 배가 지나가면서 생기는 뒷 물결에 서너 번 더 부딪치고 나면 그때부터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하여 멀리 보이지 않을 때 까지 황보호에게 계속해서 작별의 손을 흔든다.
바닷가 개펄에 얹혀있는 유빙들의 크기는 작은 것은 지프차 크기요 큰 것은 트럭이상의 크기인데 그 유빙이 바다위에 뜨게 되면 일부만 보여 그 큰 크기를 짐작하기 어렵다. 평소 시간 반이면 도착 할 수 있는 뱃길을 황보호는 한 시간은 더 지체하여 초지에 도착했던 것 같다.
며칠 후 초지에서 인천으로 돌아올 때 탄 여객선은 같은 동양기선 소속의 갑제호라는 여객선이었다. 갑제호는 백여명의 승객을 태울 수 있던, 그러니까 황보호보다 작은 기선이었으나 당시 인천에서는 귀한 철선이었고 그 모양도 황보호보다 날렵했다.
아버지가 강화에 계속 남아있어 돌아올 때는 혼자 배에 올랐는데 강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선실 밖에서 얼음바다를 구경했다. 올 때의 경우와는 크게 다르지 않은 얼음바다 여행이었는데 갑제호는 황보호의 경우와는 달리 철제선박임을 자랑하는지 대부분의 배 앞의 유빙을 속도 조정 없이 그대로 밀어버리며 달렸다. 물론 속도도 황보호보다는 빨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갑제호가 며칠 후인 2월 6일에 큰일을 내고 말았다. 원래 갑제호는 인천에서 장봉도 시도를 지나 강화도의 선수, 건평, 외포리를 거친 후 석모도를 들르고 맨 나중은 교동도에서 하루 뱃길을 마친 후 다음날은 다시 교동에서 인천을 다니는 소위 격일제 정기여객선이었다. 갑제호가 강화 가는 날에는 다른 여객선 회사(통운조합인가로 기억한다)의 2통운호 아니면 5통운호 중 한척이 엇갈려 그 항로를 다녔다.
며칠 후 한동안 끊겼던 교동도행 뱃길이 열려 갑제호가 그동안 밀린 승객으로 정원을 초과한 상태로 인천항을 출항해서 강화를 향하여 항해하다가 얼음에 배 앞부분이 깨져 승객 중 6명이 사망하는 침몰사고를 내고야 만 것이다. 다음날 바닷가 개벌에 누어있는 갑제호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으며 며칠 동안 관련된 기사가 신문을 장식했다.
나는 이 사건의 내용도 물론 당시의 신문과 라디오 뉴스를 통하여 알게 됐지만 당시 그 배를 탔던 내 친구 황인환의 이야기를 통해 이 일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
그해 인천고 입시에 합격한 교동중 출신인 인환이는 뱃길이 끊겨 인천에 머물다가 뱃길이 열린 소식을 듣고 선생님과 친구와 함께 셋이 갑제호에 올랐단다. 워낙 손님이 많아 선실이 복잡하여 인환이는 친구와 둘이 배 앞의 갑판에서 바다구경을 하고 있었다는데 그 자리는 내가 초지에서 인천 올 때 얼음바다를 구경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날은 바다에 유빙이 많아 갑제호는 평소의 항로보다 먼 거리로 돌아 장봉도에 승객을 내릴 수 있었다고 했다. 손님을 내리고 후진하던 뱃머리로 많은 유빙이 밀려있었는데 그중 제법 큰 유빙이 있었다고... 배가 다시 방향을 틀면서 전진하면서 몰려있는 유빙더미를 헤쳐 나가는데 그 제법 큰 유빙은 배에 부딪친 후 왼쪽으로 밀렸을 거라고 둘이는 생각했었단다.
그런데 잠시 후 선원이 와서 배가 파선됐다고 하면서 상갑판으로 올라가라 해서 상갑판에 오르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고 했다. 유빙에 부딪쳐 깨진 앞 선실 왼쪽부터 바닷물이 배안으로 밀려들어 배가 물에 차기 시작하니 혼비백산한 승객들은 거의 젖은 상태로 상갑판으로 몰려들었고 재빠른 승객 몇은 유빙에 올랐단다.
와중에 배 엔진이 꺼졌는데 마침 비번중인 베타랑 기관장이 식구와 함께 집이 있는 교동으로 가느라 배에 타고 있었다. 그 기관장이 물 차 오르는 기관실에서 꺼진 엔진을 다시 살려 배를 갯가로 밀어 댄 덕분에 배가 바다 속에 가라앉는 큰 사고를 면할 수 있었단다.
그런데 그 사고의 사망자 중 세 명이 그 기관장의 식구였다. 워낙 승객이 많아 복잡해서 그 기관장은 특별히 구석지고 편안한 곳에 아내와 자식들을 있게 했는데 사고 당시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구조된 승객들이 인천항에 도착한 후 그제야 가족이 모두 사망한 사실을 알게 된 기관장이 소동을 부렸다는 기사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당시는 자초지종을 몰랐다.
갑제호 침몰사건으로 나중에 선장과 동양기선의 여러 관계자가 실형 등의 처벌을 받았으나 그 기관장은 인천시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고 그 후 그 기관장이 새장가 들 때 시장이 주례를 섰다는 사실도 기억난다.
며칠 후 갑제호는 인천항으로 끌려왔는데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부두에 일부러 가서 갑제호를 구경했다. 배 앞 왼쪽에 한자 정도 크기의 구멍 난 것 이외는 겉으로 말짱한 모습이었지만 구멍난 그 선실 안은 온갖 짐, 신발, 난방용 연탄난로 등이 나뒹굴고 있어 사고 당시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어지러웠다.
갑제호가 출항할 때 경찰이 검문했다는데 왜 정원 초과를 묵인했느냐는 신문기사가 있었는데, 다음날 기사에서는 경찰의 검문 목적은 안전이 아니라 대공 업무와 관련하여 수상한 자 등을 감시하는 것이라는 해명성 기사가 있었다. 그 뒤에는 별 말이 없었다. 요새 같았으면 .......
그 후로 인천항의 얼음이 녹을 때 까지 여객선의 출항은 거의 불가능해진 바람에 그 후 나는 김포 양촌을 지나 강화 고향까지 걸어간 경험을 하게 됐다.
그런데 그 이후 40여 년이 지났어도 그때처럼 인천항이 다시 얼어 본 적이 없었다. 강화바다 앞의 유빙(성애)도 자취를 감추었는데 유빙이 사라진 이유는 온난화나 도시화의 영향보다도 한강에 생겨난 각종 담수 댐 때문이었다고 한다. 물이 댐에 저장돼 있어 수온이 덜 식어 그 옛날 한강의 두꺼운 겨울철 얼음이 사라진 때문이 가장 큰 이유라 한다.
지금 그러한 얼음바다 관광을 하려면 상당한 비용이 드는 북해도나 알라스카로 관광여행을 떠나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니 그때는 그것도 모르고 아주 좋은 구경을 한 셈이다. 이십년 전 쯤 초겨울 충주호 유람선을 탔을 때 충주호 상류에서 이 삼 센티 정도 얼어붙은 호수를 지날 때 배에 부딪쳐 얼음위로 튕기는 얼음조각을 보면서 예전 황보호, 갑제호의 그 추억을 떠 올린 적이 있다.
아마 다시 인천항이 얼어 소동을 버리는 일은 내 남은 평생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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