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인천 야구의 역사를 새로 쓰다(퍼온글)
본문
퍼온곳 : 굿모닝 인천(2020년 12월호)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인천고등학교
인천 야구의 역사를 새로 쓰다
세상 모든 학교는 귀하다. 허나 그 속에서도 특별한 전통과 저력을 품은 곳이 있다. 학교를 통해 도시를 들여다보는 인천 명문교를 찾아서. 그 일곱 번째 등굣길을 따라 인천 야구 역사에 새로운 금자탑을 쌓은 인천고등학교로 간다. 창단이래 처음으로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구도球都 인천’의 자존심을 지킨 인천고를 야구인 임호균(74회 졸업)과 함께 찾았다.
글 전규화 자유기고가│사진 최준근 자유사진가
창단 첫 봉황대기 우승으로 그랜드슬램 달성
2020년 11월 2일 서울 목동 야구장. 9회 말 2사 1·2루의 피 말리는 접전 상황에서 서울고 이승한이 타석에 들어섰다. 안타 하나면 동점, 아니 역전까지 가능한 순간. 인천고 윤태현의 투구가 포수 미트를 향해 날카롭게 휘어졌다. ‘땅!’ 배트에 맞은 공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굴러 2루수 노명현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재빨리 2루로 송구했고, 공을 받은 유격수는 다시 1루로 힘차게 공을 뿌렸다. 더블 아웃. 인천고가 제48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2004년 대통령배 이후 16년 만의 전국대회 우승입니다. 무엇보다 봉황대기 첫 우승이라는 쾌거를 달성했습니다. 여러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야구 명문이지만 봉황대기와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그 한을 이제야 풀었습니다.”
인천고는 1979년과 1996년 봉황대기 결승에 올랐으나 번번이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올 시즌 초반 겪었던 극심한 부진을 극복하고 마침내 2004년 대통령배와 1953, 1954년 청룡기, 1954, 1989년 황금사자기에 이어 2020년 봉황대기까지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인천고의 우승은 단순히 한 학교의 역사를 새로 썼다는 데 그치지 않았다. 최근 침체기에 빠졌던 구도 인천의 명예 회복이자, 코로나19로 지친 시민들에게 건넨 ‘이겨낼 수 있다’라는 응원의 메시지였다.
인천고 야구부는 한국 야구 역사의 시작점인 1905년 창단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고교 야구 강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예나 지금이나 고교 야구는 프로 야구의 화수분이듯, 걸출한 스타플레이어도 다수 배출했다. 은퇴한 임호균, 양승관, 김동기, 김경기, 장원진, 김홍집, 정경배, 최원호, 박진만, 김수경부터 현역으로 뛰고 있는 이명기, 이재원, 김재환, 박민호, 문경찬, 정은원까지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길러내며 한국 야구에 기여했다.
임호균 씨가 2005년 열린 한국 야구 100주년 기념 최우수고교야구대회 우승탑을 바라보고 있다.
제48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 직후 우승 기념사진
전설적인 선배와 한국 야구 미래와의 만남
사상 첫 봉황대기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한 3학년 강현구, 노명현, 김시현 선수가 대선배 임호균 앞에 섰다.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인천고 재학 시절이던 1974년, 한 해에 두 번이나 노히트 노런No hit no run(선발 투수가 1회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단 하나의 안타 또는 홈런, 사사구四死球도 내주지 않는 것)을 기록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평생에 단 한 번도 해내기 힘든 일인데 말이죠.”
임호균은 대한민국 야구 역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전설’ 중 한 명이다. 창영초와 인천남중을 거쳐 인천고에 입학해 활약했다. 이후 동아대에 진학한 그는 1987년 연세대와의 대통령기 대학야구대회 준결승전에 선발로 등판,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최동원과 연장 18회까지 가는 명승부를 연출했다. 한국 프로 야구가 탄생한 1982년에는 최동원, 김재박, 장효조 등과 함께 서울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983년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인천 연고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해 ‘꼴찌 팀’을 3위까지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으며, 1987년 청보 핀토스 시절에는 역대 최소 투구(73개) 완봉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태평양 돌핀스에서 현역 생활을 마감한 임호균은 프로팀 코치와 독립 야구단 감독을 거쳐, 현재는 호서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원 야구학과 초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야구선수 임호균을 키운 것은 인천고입니다. 올해는 모두 4명의 선수가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았는데, 이번 우승을 계기로 더 많은 프로 선수가 배출되어 인천고의 이름을 드높이며 대한민국 야구 발전에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74회 졸업생 임호균은 인천고 재학 시절, 한 해에 노히트 노런을 두 번이나 달성하는 대기록을 작성한 전설적인 투수다.
새로운 100년을 열어갈 인천의 명문
인천고는 1895년 6월 27일, 고종황제의 칙령에 따라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로 중구에 개교했다. 이후 관립 실업학교와 인천상업학교를 거쳐 1951년 인천고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1971년부터 현재의 미추홀구에 자리 잡았다.
“학교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던 해에 저도 입학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학교 주변이 모두 허허벌판이었죠. 운동장이라고 할 것도 없고, 비가 오면 바닥이 진흙밭으로 변했어요. 그래서 초창기에는 지금의 인천축구전용경기장 자리에 있던 도원야구장에서 훈련을 했습니다.”
도원야구장. 정식 명칭은 숭의야구장으로, 도원동에 있다 하여 도원야구장으로 불렸다. 1934년 문을 연 이곳은 2002년 인천SK행복드림구장이 개장하기 전까지 인천 유일의 야구 경기장이었다. 초창기에는 고교 야구 시합 무대로 사용되다가 프로 야구 출범 이후부터는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SK 와이번스로 이어지는 인천 연고 야구팀의 홈구장 역할을 했으며, 2008년 9월 철거되기 전까지 구도 인천의 역사와 함께했다.
“인천고의 야구 사랑은 예전부터 남달랐습니다. 고교 야구 붐이 일었던 시절에는 소풍날에도 동대문야구장으로 가 선수들을 응원했습니다. 학교 빼먹고 몰래 응원 갔다가 중계 카메라에 잡혀 선생님께 혼이 나도 마냥 즐거워하던 시절이었죠.”
임호균이 개교 100주년 기념탑과 2005년 열린 한국 야구 100주년 기념 최우수고교야구대회 우승탑을 번갈아 바라본다. 한 세기가 넘도록 인천 최고의 명문 고교로 인정받아온 학교에서, 한국 야구의 새로운 100년 역사를 써 내려갈 후배들과 함께.
우승을 이끈 3학년 강현구, 노명현, 김시현 선수가 대선배의 원 포인트 레슨One Point Lesson을 경청하고 있다.
2020-12-02 2020년 12월호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