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시인 정승열(65회)/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퍼온글)
본문
퍼온곳 : 굿모닝인천(11월호)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
시인 정승열
정승열 시인은 장수동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 시인이 장수동 은행나무를 살펴보고 있다.
전국의 800년 이상 된 나무 가운데 주요 가지의 손상이 거의 없고
타원형의 수형을 이룬 나무는 장수동 은행나무가 유일합니다.
‘장수동 은행나무’의 다른 이름은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다. 800살 넘은 전국 24그루의 은행나무 가운데 으뜸으로 인정을 받는다. 대다수의 은행나무들은 둘레만 굵을 뿐 가지가 위로 뻗치고 군데군데가 비어 있기 일쑤다.
장수동 은행나무는 그러나 가지가 하나같이 튼실해 잎이 무성한 데다 가지가 옆으로 누워 멀리서 보면 공작이 탐스러운 꼬리를 펼친 것처럼 보인다. 장수동 은행나무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정승열(74) 시인이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것은 인천 사람인 그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전국의 800년 이상 된 나무 가운데 주요 가지의 손상이 거의 없고 타원형의 수형을 이룬 나무는 장수동 은행나무가 유일합니다.” 그는 “국가 기념물 설명에 ‘아름답다’는 문구가 들어간 하나뿐인 나무”라며 “너비도 가장 넓어 한여름이나 비가 올 때 한꺼번에 수십 명이 그늘에서 쉬거나 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수동 은행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받기 위해 그는 우리나라의 모든 은행나무를 일일이 조사했다. 이를 장수동 은행나무와 비교한 자료를 만들어 2018년 인천시에 전달했고 나무 소유주인 남동구는 행정 절차를 추진, 3년 만인 지난 2월 마침내 ‘천연기념물 제562호’로 인정받았다.
이번 결실은 민·관이 함께 성심성의껏 노력한 성과인 셈이다. “제가 혼자 한 건 아닙니다. 인천에 이문회라는 공부 모임이 있는데 그 회원들이 함께한 겁니다.” 이문회以文會는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군자이문회우 이우보인’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군자는 학문을 통해서 벗을 모으고, 벗을 통해서 자신의 인덕을 키운다)이란 문구에서 따온 말이다.
인천의 역사나 현안, 미래에 대한 토론과 탐구를 하기 위해 인천의 뜻있는 사람들이 2009년 만든 모임이다. 지금은 정간한 상태이지만 <리뷰 인천>이란 잡지를 4년 정도 만들기도 했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정 시인은 네 살이던 1·4후퇴 때 부모를 따라 인천에 정착한다. 처음 주안염전 근처로 왔으나, 부친이 철도국에 취직하며 주안역 앞 ㅁ자형 2층 건물인 철도국 사택으로 이사한다. 재봉 기술을 가졌던 어머니가 중앙시장에서 맞벌이를 하며 그의 부모는 정 시인의 동생 네 명을 포함해 일곱 식구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주안초, 상인천중, 인천고를 나온 그는 인천교대를 졸업하자마자 교사 생활을 시작해 삼산중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마친다. 1973년 ‘내항문학회’를 만들고, 1979년엔 <시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이래 인천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얼마 전 <짠물론>이란 책을 펴낸 정 시인은 “인천 사람을 짠물이라고 하는데 이는 합리적이고 근면하며 절약과 배려까지 담긴 선진 정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강조했다. “인천은 유민들이 모여 만들어낸 도시입니다.
개항, 8·15광복, 6·25전쟁 등 굵직한 역사가 있을 때마다 전국 8도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죠. 개항 초 제물포 인구는 900명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지금 300만 명이 모여 잘 살고 있잖아요? 이는 우리 지역에 짠물 정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의 해불양수海不讓水(바다는 강물을 물리치지 않는다)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인생에서 한 번도 힘들었던 적이 없다”고 말할 만큼 ‘강한’ 그는 요즘이 인생의 최전성기라고 했다. “정년 뒤 줄곧 제가 좋아하는 글 쓰고,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니며 살아왔어요. 제가 부럽지 않으세요?” 장수동 은행나무를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포용력 있고 정감 어린’ 짠물 정서가 촉촉하게 반짝였다.
글 김진국 본지 편집장│사진 김성환 포토저널리스트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