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기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


6편 김학균 서예협회 고문 ‘화가 박영성’ 강의

인천투데이=이형우 기자 l 유화는 기름이 들어간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다. 유화기법의 특징은 선의 표현이 자유롭고 광택·무광택, 투명·반투명한 효과를 표현할 수 있다. 또 다양한 질감 표현이 가능하고 제작 중이나 후에도 색의 변화가 없다.


수채화는 물에 풀어 만든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다. 유화와 달리 수채화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자칫 화가의 의도와 다르게 그림에 번지고 얼룩짐이 생길 수 있다.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순발력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보통 유화를 먼저 익히고 수채화를 익힌다.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수채화를 먼저 익힌 사람이 있다. 그는 오히려 유화 기법을 수채화에 적용하는 등 실험하고 탐구했다.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한국수채화협회 창립을 주도한 박영성 선생이다.


김학균 서예협회 고문이 송암예술아카데미가 주관한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에 출연해 한국 수채화의 대가 화가 박영성 선생의 삶을 얘기했다. 아래는 강의 내용 일부를 정리한 글이다. <편집자 주>

대통령상을 수상한 '회고' 대통령상을 수상한 '회고'

“형편 어려워 교사로 일하며 그림 그려”


박영성은 1928년 충남 태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두살 되던 해 인천으로 이주해 중구 유동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인천상업학교(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창영초등학교에 부임했다.


1948년 박영성은 교사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대학교 미대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시절 실력이 뛰어났다. 인천 출신인 장발(당시 서울대 미술대학 학장) 교수는 유독 박영성을 총애했다.


궁핍한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박영성은 1955년 동산고등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이 시기 그는 학생도 가르치며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 그는 27살에 국전에 첫 작품을 출품하고 입선해 화가로 인정받게 된다.


이후 박영성은 1967년 국전에서 특선을 이뤘다. 그는 1974년 국전에서 ‘회고’라는 작품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당시 주목받기 어려운 정물화로 수상해 화제가 됐다. 파격적인 밝은 색채, 현란한 붓질, 부감법을 반영한 화면 등 정물화 기법을 사용했다.


뛰어난 점은 이런 성과를 미술에 온전히 시간을 쏟아 이룬 게 아니라 교사를 하면서 병행했다는 점이다. 박영성은 약 19년 동안 동산고에서 교사로 일하며 대통령상까지 탄 것이다.

박영성 수채화 작품. 박영성 수채화 작품.

“평생 후학 양성과 미술작품을 병행하다”


박영성은 인천 사람으로서 인천화단에 많이 기여했다. 1957년 유토피아 다방에서 개인전을 시작으로 개인전을 총 10번 개최했다. 1958년 인천에서 ‘앙테팡당’전을 창립했다. 1963년 경기미협 지부장, 1966년 경기미전, 인천시민의 날 기념미술전을 기획하고 운영했다.


박영성은 한국수채화협회 창립을 주도하고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간 회장을 맡았다. 또 아시아수채화연맹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인천에서 쭉 교단에 섰던 박영성은 후학 양성에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1976년 서울 예술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며 동덕여자대학교, 경희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 강사로도 활동했다.


국전 대통령상으로 교수 자격을 얻은 박영성은 1979년부터 1993년까지 인하대학교에서 미술교육과 교수로 부임하며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이후 박영성은 1993년 대한민국 미술계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 훈장 목련장을 수상했다.


1993년 인하대 교수직을 내려놓고 자유인이 된 박영성은 집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색감을 연구하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1996년 2월 갑자기 병이 찾아왔다. 어지럼증 때문에 병원에 간 박영성은 심근경색증으로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박영성은 추상미술을 세우고 수채화를 한층 더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수채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맑고 담백한 신선미가 어느 미술 장르보다 좋아 수채화를 그린다. 투명한 물감이 흰 종이 위에 번지고 얼룩지는 물의 생리에 따라 화면에 정착시켜가는 매력은 수채화 제작의 즐거움이다.” (수채화 전집, 박영성, 1987)


인천은 수채화의 발상지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1960년대 청관거리(차이나타운)에 이젤을 깔고 수채화 그리던 사람이 많았다. 1세대 수채화 선생님들이 학생을 데리고 가서 청관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게 했다.

박영성은 회화과 교수가 아니라 미술교육과 교수였다는 점이 아쉽다. 미술교사를 양성하는 것도 좋지만 작품에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인천대학교는 회화과가 있지만 박영성 교수가 있던 인하대는 회화과가 없다. 그가 인천예술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학생들이 지하에서 그림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인천에 유능한 고등학생 인재들이 서울, 안양, 부천으로 빠져나가고 있다. 인천이 그림을 배우고 그릴 수 있는 환경을 갖춘 도시가 됐으면 좋겠다.


이형우 기자 

 2021.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