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미추홀-제물포-인천’(복거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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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제물포-인천’(복거일 저)
복거일 소설가가 ‘미추홀-제물포-인천’이라는 장편소설을 펴냈습니다.
우리 인천사람들이라면 한번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인고인들에게는 특히 하권 여든째 이야기 ‘인천 학도의용대’를 널리 소개하고 싶습니다.
내용 중에 일부를 추려보았습니다.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950년 12월 18일 오후 축현국민학교 운동장은 인천 지역 중학생들로 가득했다. 인천 학도의용대가 소집한 모임이었다. 3,000명이나 되는 중학생들이 군대에 지원해서 싸우겠다는 뜻을 갖고 모인 것이었다.
인천 학도의용대는 1950년 6월 26일에 결성되었다. 북한군이 침입 했다는 것이 알려진 바로 다음 날, 이계송(李啓松), 고려대학교 2학년)을 중심으로 이기관(인천상업중학교 6학년), 정연옥(인천중학교 5학년), 김영택(인천상업중학교 6학년), 염상건(인천상업중학교 6학년), 박경하(인천상업중학교 6학년), 박종근(인천공업중학교 5학년) 김학일(인천상업중학교 5학년), 하철호(인천공업중학교 5학년) 등이 학도의용대를 조직한 것이었다. 북한군에 점령된 서울을 탈출한 학생들이 6월 29일 국방부 정훈국의 지원을 받아 조직한 '비상학도대' 보다 사흘 앞서 인천 학생들은 자력으로 학도의용대를 조직한 것이었다. 이들이 이처럼 빨리 학 도의용대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이미 학도호국단( 學徒護國團)을 통해서 함께 활동했던 덕분이었다. 실제로 이계송은 인천상업중학교의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지냈다.
인천 학도의용대는 본부 사무실을 마련하고 <의용대가>를 만들어서 불렸다. 그리고 치안 유지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320쪽
7월 4일 북한군이 들어오자, 인천 학도의용대는 지하로 들어갔다. 두 달이 넘는 북한군 통치 아래서 온갖 어려움을 겪고, 인천 상륙작전 뒤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전황이 다시 위급해지자, 학도의용대 간부들은 남쪽으로 내려가서 국군에 입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병무 행정을 담당하는 인천지구 병사구사령부의 승인을 얻었다.
간부들의 이런 결정은 모든 대원들의 호응을 얻었다. 위기를 맞은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애국심에다 북한군에 징집되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갈 뻔했던 경험이 겹쳐서, 모두 호응한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과 4학년 학생들이 많았고, 군대에 들어가기엔 너무 어린 중학교 1학년생들까지 나섰다.
332쪽
행렬의 맨 앞엔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가 중심이 된 학도의용대 군악대가 서서 행진곡들을 취주했다. 행렬은 시내를 지나 동남쪽으로 나아갔다. 행렬이 인천의 동쪽 지역 석바위에 이르자, 군악대는 길옆에 서서 행렬을 환송했다. 행렬이 구월동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었다. 전날 내린 눈으로 길은 미끄럽고 날씨는 추웠지만, 행렬은 강행군해서 안양에 이르렀다. 안양에선 가정집들에 부탁해서 밤을 지냈다. 그리고 이튿날 수원에 닿았다. 한겨울에 별다른 준비 없이 안양을 거쳐 수원에 오는 여정은 정말로 힘들었다. 지친 학생들은 남하를 단념하고 인천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돌아선 학생들은 1,000명가량 되었다. 남은 2,000명가량 되는 학생들은 계속 남하하기로 했다. 기차마다 피란민들로 만원이었으므로, 기차 지붕에 올라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어린 학생들과 여학생들을 먼저 태우고, 나머지 학생들은 걸어서 남하하기로 했다. 걸어서 남하한 학생들은 추풍령을 거치기나 조령을 거쳐서 남하했다. 수원에서 남해안까지는 먼 길이었지만 학도의용대 지도부가 끝까지 이들을 이끈 덕분에, 도중에서 낙오한 학생들은 없었다.
마침 마산에서 해병대가 신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이동하는 데 지친 터라, 많은 학생들이 응모했다. 결국 700명가량이 합격 해서 해병이 되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1951년 1월 초순에 통영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했다. 부산의 육군 제2훈련소를 찾아 육군에 입대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군악대가 귀에 익은 행진곡들을 취주하면서 그들을 환영했다. 뜻밖의 환영에 놀라서 살피니, 낮익은 얼굴들이었다. 국군 군복을 입은 군악대는 지난달에 인천 석바위에서 그들을 배웅한 학도의용대 군악대였다.
12월 18일 학도의용대 본대가 출발한 뒤, 남은 학생들이 모여서 추가적으로 남하했다. 12월 24일엔 본대를 환송한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 학생들 20여 명과 여학생 95명이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이 배는 인천상륙작전에서 활약한 ‘윈저급 공격 수송선 (Windsor-class attack transport)’이었다. 그 수송선은 이튿날 부산에 닿았고, 벤드부 학생들은 곧바로 육군종합학교 군악대가 되었다. 그래서 석바위에서 본대를 환송한 군악대가 부산항 부두에서 본대를 환영한 것이었다.
323쪽
인천 학생의용대 출신 학도병들은 평균 4년을 복무했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 전선 전역에 걸쳐 전투가 끊이지 않은 시기에 복무한 것이 였다. 입대한 2.000여 명 가운데, 208명이 전사했다. 이틀 가운데 둘은 입대했을 때 중학교 1학년생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학도의용군은 2만 7,7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인천 학도의용대는 전선이 무너져서 온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활동했다. 한국 정부도 한국군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시기인지라, 학생들의 자발적 조직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천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단체를 만들어 치안을 유지하고 국가 방위에 나선 일은 잊혀갔다.
학도의용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이경종(李慶鍾)이 1996년부터 학생의용대의 역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참전 당시 그는 열여섯 살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인천 학도의용대의 역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인천 학도의용대의 활약이 워낙 컸으므로, 당연히, 학도의용군의 역사도 보다 충실하게 기술될 수 있었다.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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