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인천이 기억해야 할 극작가 함세덕(32회)(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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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16. 5.30)
[인천문화읽기] 인천이 기억해야 할 극작가 함세덕
서정적 리얼리즘 극작법 대가,
그에게 인천 바다와 섬은 '영감의 원천'이었다
1915년 인천부 화평리 455번지서 출생
'산허구리·해연' 등 지역 배경 작품 많아
함세덕 재조명 목소리 … 내달 포럼 계획
1915년 5월23일 인천에서 출생, 1934년 인천 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졸업, 1940년 희곡 <해연>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1947년 월북, 1950년 선무반(宣撫班) 제2진으로 남하하였다가 서울 신촌 부근에서 수류탄 오발사고로 35세의 나이에 요절. 인천이 기억해야 할 극작가 함세덕의 일생이다.
리얼리즘 연극의 개척자인 그의 작품에서는 바다를 낀 인천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대표작 <동승>을 통해 그가 한 말 '삶은 누군가의 손을 붙잡는 일이고 손을 내미는 일이다'처럼 이제 인천 내에서 그에게 손을 내미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오는 6월7일 인천예총과 문학시어터는 '연극인 함세덕과 인천 포럼'을 개최한다. 연극사에서 최고로 평가되는 극작가 함세덕과 인천의 관계를 돌아봤다.
▲함세덕과 인천
서정적 리얼리즘 극작법의 대가 함세덕, 20여 년간 그를 성장시킨 바다와 섬은 영감의 원천이었다. 작품에는 유년기를 보냈던 목포항과 인천항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인천부 화평리 455번지'다. 조부 함선지는 정3품 벼슬을 지냈으나 대원군 때 낙향해 인천에 정착했고 인천 일본어학교를 졸업한 부친 함근욱은 나주군청 주사로 발령받아 한동안 가족들과 떨어져 지냈다.
1915년 함세덕이 태어난 해 부친이 목포부청으로 전근되자 모친과 함께 목포로 이주한다. 그 뒤 부친이 공직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하면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2학년으로 전학을 오게 된다.
이후 그가 살던 인천 부용리 177번지가 본적지로 돼 있다. 1934년 졸업하고 상경해 본격적인 문학과 연극의 길에 접어들기 전까지 인천은 그가 살아온 땅이었으며 치열한 식민지 역사의 경험은 폭넓은 관찰과 깊이 있는 사고를 갖게 했다.
1936년 21세에 조선문학에 <산허구리>를 발표하며 극작가의 길을 걷는다. 이 작품은 인천 앞 바다의 작은 포구 산허구리를 배경으로 배를 타거나 갯벌에서 조개를 잡아 어렵게 생활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렸다.
<무의도 기행>으로 또 한 번 어부의 가족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내놓는다. '떼무리'라 불렸던 소무의도에서 가난으로 암울했던 소년이 배를 타고 나가 처참하게 생을 마친 비극적인 내용으로 리얼리즘의 극치를 이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함세덕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은 단막극 <해연>은 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세워진 팔미도를 배경으로 한 가장 인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극에 등장하는 만석동 산3번지와 작약도, 영종도의 옛 명칭 자연도는 삶의 터전이었던 인천을 지리적으로 나타낸다.
세 작품은 모두 바다를 모티브로 한다. 작가에게 삶과 작품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그의 눈에 비친 인천 연안과 인근 섬 일대는 작품 속 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함세덕의 가치 재조명
함세덕은 동랑 유치진과 함께 고전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로 쌍벽을 이룬다. 사회에 발을 디디는 날부터 습작기를 거쳐 작품을 쓰고 연극을 만들었다. 짧은 인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고난의 세월을 보냈으며 힘겹고 고달팠던 삶은 주옥같이 빛나는 작품들을 남겼다.
아버지와 딸의 상반된 행동을 역설적으로 그린 <감자와 쪽제비와 여교원>, 인천 주변 섬 주민들의 삶을 밀도 있게 그린 <산허구리>와 <무의도 기행>, 백제의 마지막 왕자의 구국적 행위를 통해 민족성을 일깨워 준 <낙화암>은 서정적 리얼리즘과 신선한 감각, 연극성이 충만한 기교와 구조로 함세덕의 탁월한 극작가적 위상을 빛내 준 작품으로 꼽힌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어린 스님의 모습을 불교적으로 그린 <동승>은 2003년 영화로도 개봉돼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고 세계 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다.
전국이 국립한국문학관 유치로 떠들석 한 요즘, 각 지자체마다 지역 출신의 유명 문인, 시인들을 내세우며 문학관 유치 최적지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강암서예대전', '유재하음악경연대회', '김유정문학관' 등 인물의 이름을 대입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문화의 대명사가 됐지만 인천 출신 작가들의 이름과 작품은 단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지난해 함세덕은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열린 '2015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제'에 황순원, 박목월, 서정주, 임옥인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인천은 그를 기념하는 행사를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그동안 인천에서 함세덕을 단 한 번도 조명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미 2002년 함세덕 연구소가 탄생해 공모를 거쳐 인천연극의 랜드마크가 되기 위해 지원금을 받아 운영했지만 1년을 넘기지 못 했다.
지역의 가치 재창조와 문화 발전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인천이 낳은 극작가 함세덕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인천예총은 오는 7일 오후 4시 문학시어터에서 함세덕과 인천 연극의 미래를 주제로 '연극인 함세덕과 인천 포럼'을 개최한다.
김만수, 윤진현 인하대 교수의 발제와 김학균 인천예총사무처장이 좌장을 맡고 전성희 명지전문대 교수, 이희환 전 인하대 HK 교수, 김진국 인천일보 문화체육부국장이 토론자로 나선다.
퓨전 국악팀 '더 율'의 공연과 극단 '다락'의 낭독극도 펼쳐질 예정이다. 함세덕의 자취를 중심으로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인천 연극의 지속 가능한 발전방안을 나누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학균 인천예총사무처장은 "이제 함세덕 문학작품의 가치관을 찾아 정체성을 확립할 때"라며 "함세덕의 생가를 복원해 관광 내지는 인문학의 자원으로 활용한다든가 그의 이름을 내건 연극제를 추진해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인천만이 가질 수 있는 변별력"이라고 말했다.
이어 "14년의 생애 중 20여 편의 창작극과 4편의 각색 글을 남겼지만 공연이 안 된 작품이 없을 정도의 시(詩)적 리얼리즘의 성공을 가져온 작가는 함세덕뿐"이라고 덧붙였다.
/김신영 기자 happy1812@incheonilbo.com
2016년 05월 30일 00:05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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