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운명의 저울이 희망으로 기울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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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저울이 희망의 쪽으로 기울도록!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2009. 2. 10
[조세/경제 칼럼]
하버드 대학의 대니 로드릭 교수는 지나간 30년은 ‘밀턴 프리드먼의 시대’였다는 표현을 블로그에 쓰고 있다. 이 ‘밀턴 프리드먼의 시대’를 보면 미국에는 레이건 대통령, 영국에는 대처 수상, 중국에는 등소평 같은 걸출한 이들이 지도자로 등장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시기를 신자유주의가 풍미하던 시절로 규정한다. 신자유주의자들 스스로도 그 시절에 개인은 한껏 자유를 누리고 경제적으로는 마냥 번영을 누렸다는 주장을 한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시장을 전지전능한 신으로 본 밀턴 프리드먼 교수의 경제철학은 다섯 가지 원칙으로 요약된다. 첫째, 정부는 단지 인플레이션을 방지하는 금융정책을 유지할 것. 둘째, 정부는 시민의 대리인(심부름꾼)에 불과하므로 은전을 베푸는 시혜자로 착각하지 말 것. 셋째, 정부는 시민들의 사생활에서 멀찌감치 물러서서 간섭하지 말 것. 넷째, 정부는 국민들의 경제활동에 대하여 감 놔라 배 놔라 나서지 말 것, 다섯째, 자유로운 토론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통해 이상과 같은 네 가지 원칙을 지키는데 열성적이고 낙관적일 것.
그러나 이 원칙에 비추어 보더라도 대처 수상은 네 번째 원칙을 지키지 못하였고, 레이건은 두 번째와 네 번째 원칙을 지키지 못했으며, 등소평은 셋째만 빼고는 모두 실패하였다는 평가를 받다시피 프리드먼식 경제철학은 과거나 지금이나 아귀가 살짝 안 맞는 문짝 같은 것임을 버클리대학의 드롱 경제학 교수(미 재무성 차관 역임)는 상기시키고 있다. 그는 오히려 시장 숭배로 야기되는 많은 문제점들과 심각한 경제침체를 막기 위하여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입, 관리하여야 하며, 사회복지증진을 위한 소득재분배를 강화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점점 더 어두운 그림자가 월 스트리트를 덮던 작년 10월 블룸버그 뉴스의 윌리엄 페섹은 ‘폴 크루그먼은 케인즈 경제학이 결코 사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였다’는 칼럼을 썼다. 모두가 밀턴 프리드먼의 주술에 빠져 낙관의 늪에 빠져있을 때 폴 크루그먼은 정확하게 미국발 서프라임 위기의 도래를 예견하고 케인지안적인 처방까지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프린스턴 대학의 경제학 교수인데 평소 폴이 뉴욕 타임스에 신랄한 경제 칼럼을 실을라치면 신자유주의의 선봉장인 부시 나 그린스펀은 먹던 음식이 소화가 되질 않을 정도였다. 시장을 그토록 방만하게 놔두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경고음을 계속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점에서는 폴 크루그먼 교수야말로 특히 아시아인들이 주목해야 할 탁월한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1997년에 아시아가 거대한 외환대란의 직격탄을 맞기 이전에 일관성 있는 예견을 하고 경고음을 내주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뒤이어 아시아 국가들이 인상적으로 그 위기를 회복해낼 것이라는 족집게 예견 역시 결과와 맞아 떨어졌다.
경제학 좀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과거 ‘프리드먼의 시대’에 케인즈적 경제철학을 이야기하면 모자란 사람 취급 받기 딱 좋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성지인 미국조차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제 폴 크루그먼 교수가 내놓은 처방전과 ‘닮은’ 경제정책들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신성한 원칙들이 깨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을 치유한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 경제회복 처방전과도 흡사하다.
케인즈 경제철학이 부활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인생사에 ‘다수를 따라 함부로 악을 행하지 말지어다’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게 된다. 모두가 넓은 길로 갈 때 좁은 길로 가는 소수를 다수가 미워하지 않아야 한다. 남이 가지 않는 ‘좁은 길’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투자와 경제에도 통하나 보다.
밀턴 프리드먼의 경제관이 풍미하던 레이건 재임시절을 보면 레이건 정부는 소득세와 법인세 세율을 대폭 인하하였다. 그 결과 주식을 소유하고 있던 주주 등 고소득층에게 그 혜택이 편중되었다. 부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 공화당은 부유층의 세금을 인하하고 저소득층 혜택을 줄이며 복지정책을 줄이는 정책을 일관되게 펴왔다.
그 결과 상류층에 대한 최고 소득세율은 1979년에 70%이던 것이 2006년에는 반절을 뚝 잘라 35%로 내렸고, 같은 기간 상류층의 장기자본이익은 28%에서 15%로, 슈퍼부자들이 소유한 법인에 매기는 세율은 48%에서 35%로 최고세율이 인하되었다.
그러나 폴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 상류층(super rich)의 소득세율만큼은 지금처럼 특혜를 주어서는 아니 되며 누진적 세율구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2001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학 경제학 교수의 입장도 매한가지이다. 그간 소득불균형이 지나치게 심화되어 왔는데 보다 누진적인 소득세 구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경제의 자동안정화장치(automatic stabilizer)가 되어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런 추가 세입을 활용하여 미국 GDP의 0.7% 정도는 지구촌의 빈국을 위하여 해외 원조도 하라는 것이다. 혹독한 서프라임의 시련을 겪고 있는 와중에도 먼 나라의 가난한 이웃까지 챙기는 그들의 지성이 존경스러운 뿐이다.
버틀런드 러셀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그리고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 것이다. 이러한 열정들이 거센 바람과도 같이 나를 이리 저리 제멋대로 몰고 다니며 깊은 고뇌의 대양 위로, 절망의 벼랑 끝으로 떠돌게 했다.” 세 번째 ‘연민’의 하나로 세계 차원의 불평등 문제를 러셀은 번민하였다. 경제정의를 소망했다. 지성을 가진 이는 이런 고민을 한다. 우리도 그의 말처럼 우리 각자의 작은 ‘무게를 보태어 운명의 저울이 희망 쪽으로 기울도록 최선을 다해’ 나갈 때 세상은 긍정적으로 변화해 가지 않을까?
댓글목록 0
김진웅님의 댓글
버틀런드 러셀은 자서전에서 밝히듯 세 가지 명제를 안고 치열하게 살았다는데 ... 1. 세 명의 여인과 살았고(사랑), 2. 원없이 지식의 탐구를 하였고(강의, 기고), 3. 인류의 불평등에 대한 연민으로 고뇌하며 살았다는데 ... 인류에 대한 연민으로 고뇌를 하였다는 대목에서는 !!
이광열님의 댓글
관치와 시장주의의 경계에서 최상의 화음을 이끌 변주곡의 실력자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