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칼럼
정승렬(65회) 시인의 수상록 <짠물론>을 읽고(퍼온글)
작성자 : 인동홈
작성일 : 2021.08.19 21:55
조회수 :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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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 : 인천일보(21. 8.19)
[내 생각엔] 정승렬 시인의 수상록 <짠물론>을 읽고
인천 문단의 원로 중 한 분인 정승렬 시인의 수상록 <짠물론>을 읽었다. 35년 전인 1986년 11월부터 8년간 '새얼회보'에 실렸던 내용이라고 한다.
책장을 넘기며 떠오른 명언이 있다. “인간은 타향에서 태어난다. 산다는 것은 고향을 찾아가는 그것이다”라고 한 프랑스 화가이며 시인인 '베르네'의 말과 “시대가 변해도 진리는 절대로 변치 않는다”는 말이다. 시대를 초월한 진리이기에 35년이 지난 지금에도 홀연히 나타난 밤하늘의 유성처럼 심장을 파고든다.
1962년, 서울로 꿈에 부푼 초등학교 졸업반 수학여행을 갔다. 농촌 아이들이 설레는 가슴을 잠재우지 못하자 여관 종업원은 인천에 산다는 이유로 고깃배를 본 적도 없는 우리에게 “뱃놈의 XX들!”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약국을 개업할 땐 “짠 놈!”이라는 '뒷담화'를 들었다. “짠물”이라는 호칭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던 중에 듣던 점잖은 호칭이었다. 그들은 인천이 바닷가 항구도시이고 소금을 생산하는 지역이라는 이유로 폄하했을 것이다.
정 시인은 인천에 거주하는 사람이 짠물로 불리게 된 이유를 들며 짠물의 근본정신을 설명했다. 항구라는 지리적 요건으로 1883년 개항 당시 1000명도 안 되던 제물포의 인구는 서부개척시대를 방불하듯 1900년엔 1만6455명으로 불어났다. 게다가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겪으며 대량의 유민이 들어왔다. 어려운 환경에서 많은 인구가 생존경쟁을 하려니 자연적으로 낭비를 안 하는 구두쇠가 되어야 했고 상호 경계와 권리와 이익을 분명히 챙기는 근성이 생겼다.
당시 외국 문물을 공부한 지도층은 낭비보다는 절약과 검소함을 생활화하는 선진국을 배워야 한다며 칭송했다. 그러면서도 인천사람은 짠물로 매도했다. 하지만 그들도 인천으로 이사를 오는 순간 짠물로 불리게 되는 것이 아이로니컬하다.
인천사람이 되기 위해선 자기가 입고 들어온 지방색을 벗어야 한다. 자신의 소중한 고향을 잊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현재 고향과 구분하라는 것이다. 인천사람으로 어울려 살기 위해선 짠물의 근본정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인천사람의 애향심과 응집력이 절실하며 자율적인 시민단체인 '새얼문화재단'이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정 시인은 피력했다.
인천사람의 긍지를 가슴에 품을 수 있도록 인천엔 자랑거리가 많다. 야구의 명문인 동산고와 인천고, 농구의 송도고, 럭비의 인천공고, 무감독 시험의 제물포고가 있었다. 한국 최초의 각종 기록 말고도 인천은 국민들에게 짚신 대신 고무신을 만들어 보급한 안기영 님, 고미술 문화의 개척자 우현 고유섭 선생, 현대 한국화 개척자인 이당 김은호 화백, 맹인들을 위해 훈맹정음을 창시한 박두성 선생, 여성 교육의 개척자인 김활란 박사, 동명국민학교를 설립한 박창래 교장, 희곡작가 함세덕, 소설가 김동석과 현 덕, 흑인 시를 쓴 진보시인 배인철, 북경까지 가서 세례를 받고 온 천주교 이승훈,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가 최영섭 선생과 작사가 한상억 선생 등이 인천 출신이다.
정 시인은 어릴 적 짱구라고 놀림을 받은 두 학우의 경우를 들며 졸업할 때까지 화를 내는 아이와 “짱구는 머리가 좋대!”라며 오히려 자랑스럽게 웃는 아이를 비교했다. 서두에 격려의 글을 쓴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모 정치인의 “이부망천!” 망언을 “부천에서 망한 사람이 자살하기 위해 인천에 오는 곳이 아니라 재기하여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온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이것이 바로 짠물의 근본정신이며 인천사람의 긍지가 아닐까.
/김사연 전 인천시약사회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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